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꿈 - (6) 기이한 시공을 나는 나비

이성희 승인 2021.01.13 23:05 | 최종 수정 2021.01.20 10:47 의견 0

양치기 산티아고는 무화과나무가 서 있는 낡은 교회에서 잠을 자며 똑 같은 꿈을 연달아 두 번 꾸게 된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가면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된다는 꿈이었다. 산티아고가 천신만고 끝에 피라미드에 도달했을 때 다른 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티아고를 붙잡아 고문하던 병사들의 우두머리가 꾼 꿈이었다. 산티아고가 교회에서 꿈을 꿀 그 무렵, 그 역시 이 피라미드 아래에서 똑 같은 꿈을 연달아 두 번 꾸었다. 한 양치기들이 종종 잠을 자고 가는 스페인의 낡은 교회의 무화과나무 아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꿈이었다. 브라질의 작가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의 꿈 이야기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꿈이 서로를 비출 때 꿈은 기이한 시공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에셔 - 「손을 그리는 손」
에셔 - 「손을 그리는 손」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왕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붉은 왕은 잠들어 있었다. 트위들디가 앨리스에게 속삭였다. “왕은 앨리스의 꿈을 꾸고 있는데, 왕에게는 앨리스가 꿈속의 대상일 뿐 그밖에 아무런 현실성도 갖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왕이 깨어난다면 앨리스는 촛불을 불어 끈 것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트위들디는 덧붙인다. 그런데 거울 나라의 이야기가 앨리스의 꿈이며, 붉은 왕은 앨리스의 꿈속 환영이 아니던가. 앨리스가 깨어나면 붉은 왕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앨리스의 꿈과 붉은 왕의 꿈은 서로를 비추면서 마주 보고 있다. 누가 누구를 꿈꾸는가?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가 시전한 기이한 내공의 초식, 「손을 그리는 손」을 보라. 누가 누구를 그리는가? 한 손은 앨리스의 꿈이고 한 손은 붉은 왕의 꿈이다.

앨리스 꿈속의 환영(붉은 왕)이 꾸는 꿈속에 앨리스가 꿈속의 꿈의 환영으로 등장하는 것이나 손에 의해 그려지고 있는 손에 의해 손을 그리는 손이 그려지는 것, 이러한 패턴을 우리는 피드백, 혹은 되먹임이라고 한다. 이미 마주보는 거울에서도 체험했듯이 서로 마주보며 되먹임이 일어날 때 이상한 꼬임 현상이 발생하는데, 우선 앨리스-붉은 왕의 꿈과 손을 그리는 손을 묘사한 바로 나의 앞 문장도 살짝 이상스럽게 꼬여 있다. 이 이상한 꼬임 속에서 꿈의 가장 의미심장한 비의가 드러나게 된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다시 펼쳐 보자. 이 옛 소설을 그저 겨울날 아랫목에 모여서 할머니에게 듣던 옛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구운몽』은 2중 되먹임 구조의 꿈으로 교묘하게 구성된 놀라운 작품이다. 코엘료나 루이스 캐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남악 형산에 있는 절에 육관대사라는 고승이 있고, 그 고승의 제자인 성진의 꿈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소유의 일생이다. 양소유가 북방의 토번을 토벌하는 장수로 출정했을 때의 일이다. 산 아래 진을 치고 장막 안에서 촛불을 켜고 병서를 읽다가 깜박 잠이 든다. 꿈에 양소유는 용녀(백능파)를 만나고 남해 용왕 아들 남해 태자를 물리친 다음 돌아가는 길에 남악 형산을 지난다. 마침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한 절에 오르게 되는데, 그 절에서 그는 육관대사를 만나고 꿈에서 깨게 된다. 그 절은 성진이 생시에 수도하고 있는 바로 그 절이다. 꿈속에서 그 꿈을 꾸고 있는 생시를 꿈 꾼 것이다. 성진의 꿈과 양소유의 꿈이 서로 되먹임 되고 있다. 앨리스와 붉은 왕의 꿈처럼. 그리고 『구운몽』에는 또 한 겹의 되먹임이 남아 있다. 그것은 잠시 후에 만날 것이다.

[그림2] 유관도 「소하도」
유관도 - 「소하도」

원나라 때 궁정화원 유관도(劉貫圖, 1258∼1336)가 그린 여름 더위를 식힌다는 의미의 아름다운 그림 「소하도(消夏圖)」에는 놀랍게도 꿈-미로의 끝없는 끝이 암호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장자가 설계했던 두 번째 꿈-미로의 패턴이다. 이제 갈 데까지 가보자. 이판사판이다. 침상에 한 사내가 기대어 누웠다. 아득한 곳을 향한 시선, 고요한 표정, 올올이 바람을 품은 듯한 수염에는 탈속적이고 표연한 정신이 느껴진다. 불진(먼지떨이; 은자의 상징물)을 들고 있으니 세속을 떠난 은자라고 보면 된다. 사내 뒤로 큰 병풍이 있는데 병풍에는 한 선비가 서재에서 일과를 위해 시동들이 먹과 종이를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 산수화를 그린 병풍이 있다. 병풍 속의 병풍이다. 병풍 속에 병풍을 그리는 양식은 당송 시대에 잠시 유행했던 양식이다. 그런데 「소하도」가 다른 그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병풍 밖의 인물과 병풍 속의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 그림을 심오하게 한다. 일단 병풍을 꿈의 세계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이 그림은 꿈속의 꿈을 그린 그림이다. 잠든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개-소린가, 하시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음 그림을 보시라.

[그림3] 유관도 「몽접도」
유관도 - 「몽접도」

「몽접도(夢蝶圖)」 역시 유관도의 그림이다. 평상에 누워 있는 인물과 기물의 배치가 「소하도」와 유사하지 않은가? 평상과 탁자의 기물들, 가슴을 헤치고 누운 모습, 탁자에 기대 세워진 비파가 그렇다. 특히 이 비파를 꼭 기억해 두자. 그림의 제목이 ‘몽접’이니, 나비를 꿈꾼다는 것이로다. 나비의 꿈이라니, 이는 이 세상 꿈 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경이로운 장자의 ‘호접몽’을 말한다.

지난날 장자는 나비(호접)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 자기가 장자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이 장자가 아닌가. 도대체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일까? (『장자』 「제물론」)

누구나 한번쯤을 들었던 그 꿈 이야기다. 유관도는 「몽접도」로 장자의 호접몽의 비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소하도」를 그린다. 「소하도」는 「몽접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유관도는 「몽접도」에서 표현하지 못한 무엇인가를 「소하도」에서 그렸던 것이다.

[그림4] 유관도 「소하도」 부분
유관도 「소하도」 부분

「소하도」에서 유관도는 꿈의 이미지를 병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 평상에 누운 은자의 꿈이 빚은 환영이 병풍 속 평상에 앉아 있는 인물이고 이 인물의 꿈이 산수의 풍경이다. 그런데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 탁자 위에 돌돌 말려 있는 꾸러미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이게 놀라운 비밀을 품고 있다. 이 꾸러미는 죽간(竹簡)이다. 죽간은 종이가 생산되기 이전에 대나무 조각에 글을 쓰고 가죽끈으로 꿰어 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반면 병풍 속의 책상에는 종이로 된 두 권의 서책이 쌓여 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평상에 누운 은자는 죽간이 쓰이던 까마득한 과거의 인물이고 병풍 속의 인물이 현재(원나라)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시공이 뒤바뀌어 있다는 말이다. 평상에 누운 은자의 정체를 짐작하게 하는 상징물이 있다. 탁자에 기대 있는 비파다. 죽간 시대, 은자, 비파를 모두 만족시키는 인물은 바로 위진 시대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인 완함(阮咸)이다. 혹은 완함을 꿈꾸는 자이거나.

정리하자면 이렇다. 꿈의 이미지로 보여 졌던 병풍 안이 실제 현실이고, 이곳에서 선비는 산수 속 은자의 삶을 꿈꾼다. 그것이 병풍 속의 병풍인 산수화로 드러난다. 이 선비가 꿈속의 산수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그는 그림에서 현실 세계처럼 보이는 완함의 공간으로 불쑥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선비의 공간은 꿈이면서 현실이고, 완함의 공간은 현실이면서 동시에 꿈속의 꿈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밖이 나오고, 밖이 곧 안이다. 은자의 꿈이 선비인지, 선비의 꿈이 은자인지 알 수가 없다. 꿈과 현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다. 이 미로는 끝이 없다. 장자가 설계한 호접몽이라는 되먹임 꿈-미로 패턴이다. 호접몽을 그리기 위해 잠든 모습이나 나비를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경이롭게도 유관도는 그 미로의 패턴을 그린 것이다. 지금 유관도를 만날 수 있어서 이것을 말하면 그가 틀림없이 들킨 것에 놀라면서 음흉하게 씩 웃어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앞 회에서 제기했던 의문이 있었다. 꿈속의 꿈…, 꿈의 양파껍질을 다 벗기면 무엇이 나타나는가? 없다. 그냥 꿈이다. 아니 장자의 대답은 우리가 이것만은 확실한 현실이라고 경계선을 그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꿈과 현실은 끝없이 서로 이어지는 되먹임 속에 있다. 성진이 꿈에서 깨어나자 육관대사가 인간세상 재미가 어떻더냐고 묻는다. 성진이 하룻밤 꿈으로 대사께서 자기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자 육관대사가 말한다. “네가 ‘제자가 인간세상의 윤회하는 일을 꿈으로 꾸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네가 꿈과 인간세상을 나누어서 둘로 보는 것이다. 너의 꿈은 오히려 아직 깨지 않았다. (중략) 성진과 소유 누가 꿈이며 누가 꿈이 아니냐?” 이것이 소설 전체의 틀을 이루는 다른 한 겹의 되먹임이다.

혼돈이론에서는 모든 물리학적 현상이 되먹임의 패턴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하다. 현실과 꿈, 안과 밖, 이것과 저것은 뫼비우스 띠나 클라인 병처럼 서로 이어져 끝이 없다. 되먹임 패턴의 다른 말이 어쩌면 유마거사의 ‘불이(不二)’이거나 장자의 ‘신비로운 동일성(玄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우주도 꿈꿀까? ‘나’는 꿈속의 꿈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를 마주보는 되먹임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꿈꾸며 또 꿈꾸어지고 있다. 부디 이 꿈이 훨훨 나는 나비처럼 유쾌하기를. (꿈 테마 끝)

이성희 시인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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