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2)청학을 본 사람이 있는가?

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청학을 본 사람이 있는가?

조해훈 승인 2018.02.22 00:00 | 최종 수정 2021.02.07 17:52 의견 0


불일폭포 위의 불일암. 신라시대에 진감국사가 세웠다는 작은 암자로, 지금은 일룡 스님이 혼자 수행하고 있다. 사진=조해훈

화개골 목압마을에 살고 있는 필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집 뒤쪽의 불일폭포를 찾는다. 나에게 그곳은 그냥 단순한 폭포가 아니다. 대학 때부터 꾸준히 발길을 한 곳이다. 그건 그냥 아름다운 폭포가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 공간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그토록 찾던 청학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많은 글을 남겨 언제라도 그것들을 읽을 수 있고,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청학동은 사람들에게 물과 바위가 빼어나 아름답기 그지없어 신선과 함께 상상의 동물인 청학이 깃들어 살 만한 곳, 즉 인간 세계가 아닌 별유천지 이상향을 말한다. 고려 후기에 이인로가 청학동을 찾아 쌍계사까지 왔으나 결국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유지리산청학동>(遊智異山靑鶴洞)이라는 한시를 지어 남기고 돌아갔다. 시는 그의 문집인 『파한집』에 실려 있다.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頭流山逈暮雲低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과 흡사하네 萬壑千岩似會稽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니 策杖欲尋靑鶴洞
저편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 들리네 隔林空聽白猿啼
누대는 가물가물 삼신산은 저 멀리 보이고 樓臺縹緲三山遠
이끼 낀 바위의 네 글자 희미하네 苔蘚微茫四字題
비로소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딘가 試問仙源何處是
꽃잎 떠내려 오는 계곡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落花流水使人迷

그는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켜 문신을 멸시하던 혼란스런 시기에 사촌형과 함께 어지러운 속세를 벗어나 청학동에 살기로 마음을 먹고 화엄사를 거쳐 의신마을까지 갔던 것이다. 만약 그가 불일폭포까지 갔더라면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이인로는 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목압마을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수많은 문사들이 청학동이라 불렸던 불일폭포와 그 인근을 찾아 시와 글을 남겼다. 그때는 쌍계사 스님들이 안내를 하였다. 스님들이 선비들의 앞뒤에 서서 호랑이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호각을 불면서 폭포까지 길잡이를 하였던 것이다. 현재 일반인들에게 청학동으로 널리 알려진 하동 묵계리 청학동 도인촌은 유불선갱정유도회(儒佛仙更定儒道會)라는 종교 단체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곳이다. 고려 후기의 유학자 이인로가 신선 세계로 알려진 청학동이 화개동천의 쌍계사 일대라고 이처럼 시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도 청학동, 즉 신선 세계는 화개동의 쌍계사 위쪽 지역을 지칭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권력에서 밀려나 합천 해인사 등지를 돌아다니며 방랑하다다가 말년을 이곳 청학동에서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마을과 폭포 중간지점에 고운 선생이 학을 불러 타고 놀았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다.

눈이 쌓여 미끄러운 돌길을 걸어 마침내 불일평전에 다다랐다. 예전에 10여 년 간 이 평전을 지키던 변규화 선생이 생각났다. 그도 말년에 필자의 마을인 목압에서 살다 세상을 버렸다. 필자는 변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불일평전에서 50m가량 더 가다 직진하면 불일암이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상불재를 거쳐 삼신봉·세석평전으로 갈 수 있다. 여기서 50m가량 가던 길로 가면 불일암이 나온다. 통일신라 시대에 진감국사가 세웠으며,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했다고 하는 자그마한 암자이다. 지눌 스님이 입적하자 고려 희종이 ‘불일보조’라는 시호를 내려 이후 그가 수도하던 암자를 불일암, 인근의 청학폭포를 불일폭포라 칭하였다고 한다.

불일암에서 불일폭포까지는 대략 200m 거리다. 절벽을 깎아 잔도를 만들어 나무 계단을 설치해놓았지만, 그래도 폭포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예전에는 폭포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폭포로 연결되는 길이 없고 절벽이 몇 개 가로막혀 있다. 이토록 추운데 폭포수가 흐를까? 폭포의 높이는 60m가량 된다. 지난여름에는 너무 가물어 폭포의 물줄기가 오줌발처럼 겨우 졸졸졸 흘러 모양이 썩 좋지 않았다. 불일폭포 왼쪽이 청학봉, 오른쪽이 백학봉으로 불리며, 기암절벽에 봉우리들이 폭포를 둘러싸고 있다.

폭포 가까이 나무계단을 내려가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폭포에 허연 게 보였다. “저게 뭐지?”라며 가까이 갔다. 순간 몸에 전율을 느꼈다. 아, 이럴 수가! 학이 폭포에 얼어붙어 있다. 그것도 시퍼런 학이! 위에서부터 부리와 몸통, 다리의 모습이다. 저 청학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저렇게 나와 맹추위에 얼었다는 말인가. 심장이 떨리고 내 감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학이 폭포수 속에 숨어살다 나오려다 폭포수가 어는 바람에 같이 얼어붙은 것 아닐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 청학은 신선이 사는 곳을 상징하는 새였다. 그 외에도 신선을 상징하는 단어들은 도화동, 계곡물에 떠내려 오는 복숭아꽃, 바위에 새겨진 바둑판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청학이 신선을 나타내는 최고의 상징어였다. 필자도 어쩌면 상상 속 그 청학의 이미지를 가슴에 안고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폭포를 찾았고, 지금은 아예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눈앞에 현실화되어 있다니! 나 혼자만 저 청학을 보는 것이다.

청학을 상상하는 선비들의 많은 한시를 통해 나는 신선이 사는 마을을 늘 그리고 있었다. 이 화개골에서 출가하여 쌍계사 주지를 지낸 서산대사 휴정이 읊은 오언절구 <청학폭포>를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 하겠다.

유월 불더위에 서리와 눈이 내리고 六月飛霜雪
온몸 차갑기가 쇳덩이와 같구나. 渾身冷似鐵
물소리는 계곡의 심장을 흔들고 聲搖洞壑心
폭포의 색깔은 허공의 뼈마저 빼앗아 버리네! 色奪虛空骨

시 제목인 청학폭포는 바로 불일폭포를 말한다. 이로 볼 때 불일폭포의 옛 이름은 청학폭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위 시는 서산대사가 쌍계사 주지를 지낼 때 이 폭포에 와 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도 ‘불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원 명칭인 ‘청학’이라고 쓴 것은 그도 이곳이 청학이 사는 골짝, 즉 청학동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도 “청학 탄 신선은 어느 곳에서 사는고?(靑鶴仙人何處棲)/홀로 청학을 타고 동서로 마음껏 다니겠지.(獨騎靑鶴恣東西)/… …”라며 시 <청학동>(『점필재집』)에서 읊었다. 기대승도 <天城의 운을 차운한 세 수>(『고봉집』)의 시 가운데 “…/성낸 폭포소리 서늘한 바람 일으킨다(怒瀑中爽吐風)/섭섭하여라 신선을 만나지 못하니(只憑孤鶴望層空)/…”(둘째 수의 2, 3구절)는 불일폭포를 묘사한 것이다. 기대승도 폭포에서 신선을 만나지 못하였다며, 이곳을 신선이 사는 청학동으로 인식하였다.

불일폭포가 시퍼헌 색으로 얼어붙어 있다. 마치 청학이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위에서 부터 부리, 몸통, 다리처럼 보인다. 사진=조해훈

필자에게도 모처럼 시적 감흥이 일었다.

불일폭포의 청학

나는 오늘 마침내 보았네
저건 폭포로 떨어지던 은가루가 아니니
폭포 뒤에 숨어 있던 푸른 학
아무도 없을 때 바깥으로 치솟곤 하였을
청학이 추워, 너무 추워 물 밖으로 나오다
시퍼렇게 멍 자국처럼, 울음처럼
관세음보살로 얼어붙어 있다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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