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자 박선정의 '돈 드릴로와 함께 세상 읽기' 3 - 『리브라』㊤ 인사이더가 되고 싶었던 지독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박선정 승인 2021.06.07 11:17 | 최종 수정 2021.06.17 16:05 의견 0

1963년 11월 22일 '전 세계를 흔드는 총성이 들려온다'. 이 총탄으로 인해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 중이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몇 초의 시간을 통해 이전에는 완벽한 무명인이자 아웃사이더였으나 이제는 미국과 세계의 역사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 온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리 하비 오스월드’다. 돈 드릴로의 1988년 소설 『리브라』(Libra)는 바로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사건의 전개가 시간 순으로 되어 있지도 않으며 공간조차 종횡무진인 데다가 등장인물도 많고 그들의 이름조차 수시로 변한다. 특히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리 하비 오스월드는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러다 보니 소설 전개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의 소도시 브롱크스에서 시작하여 일본과 러시아로 넘나들다가 다시 미국의 댈러스로 이어지는 공간적 이동과 더불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적인 이동, 그리고 열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 간의 복잡한 연결망은 결국 하나의 순간과 사건으로 이어진다. 소설 말미에 비교적 짧게 등장하는 JFK가 살해되던 순간이다.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는 이전에는 전혀 주목을 받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 이름조차 알 필요가 없었던 한 인물이 있었다. 리 하비 오스월드다.

소설 '리브라' 표지

드릴로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쓰기 위해 JFK의 살해사건을 다룬 1.5톤 분량의 워런 보고서의 절반 이상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마치 또 하나의 긴 사건 보고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 말미에 이것은 분명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 번역본의 표지에 씌어진 ‘JFK 암살범에 관한 기록’이라는 부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 소설은 ‘대통령 암살범’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이야기는 리 오스월드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리는 어머니인 마가렛의 세 번의 결혼 중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머니는 리의 생부가 죽자 다시 재혼한 세 번째 남편과도 이혼한 채, ‘끊임없이 출몰하는 바퀴벌레들을 프라이팬으로 때려잡으면서’ 지독한 가난 속에서 혼자 아들을 키워야 했다. 리의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짓누르는 고단함’을 아들에게 길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위로를 삼던 싱글맘이었다. 리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난독증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책을 읽는 조용한 성격의 아이였으며, 가난한 동네에 위치한 학교와 그곳의 또래 아이들에게도 관심 받지 못한 채 종종 집단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던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했던 그의 인생 책은 『미해병대 교본』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미해병대 시절 리 하비 오스월드 [USMC / public domain]

해병대 군인이었던 형과 그가 두고 간 『미해병대 교본』의 영향 아래 결국 해병대에 지원을 함으로써 리는 기꺼이 ‘체제의 부속품’이 된다. 이 즈음에서 드릴로는 리의 일본 파병과 군대 영창에서 겪는 가혹한 인간 존엄성 말살의 경험들을 길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환영 받지 못한 채 세상에 태어나 전혀 즐겁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더 철저하게 고립되고 이용당하는 체제 내의 부품으로 전락한 채 ‘아무것도 아닌’(nothing) 존재로서 살아가야 했던 리 하비 오스월드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그는 자신은 철저한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망명을 시도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물론, 이 또한 실제로 죽으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자신의 망명에 대한 진정성을 입증하려는 일종의 무기였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한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노력 끝에 망명에 성공한 그는 해병대원으로서 알게 된 군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러시아 외곽지대인 민스크의 공장 노동자로 보내질 뿐이다. 또 다시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셈이다. 이곳에서 ‘미국인이라는 매력에 끌린’ 한 러시아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지만, 자신이 더 이상 러시아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방인’임을 깨닫고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러시아에 머물면서 알게 된 그곳 정보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이 그가 가진 무기다.

리의 이러한 행보들은 마침내 몇몇 어둠 속 인물들의 관심을 끌고 그는 더 큰 음모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이렇게 그는 더 큰 음모를 꾸미는 권력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계획의 희생양'이자 '완벽한 바보'가 되어 JFK 암살자로 이용당한다.

“그가 창가에서 총을 몇 번 쏜 것은 사실이나, 누구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는 누구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뿐이다. 실제 암살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 그가 고독한 저격수인 것처럼 보이도록 그들이 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다른 사람의 몸에 이어붙이기까지 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도용해 위조 서류를 꾸몄다. 그를 완벽한 역사적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리브라』중에서)

현실 속에서도 케네디 암살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완벽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미국을 넘어 세계는 1963년 11월 22일 이후, 우리가 알고 있고 법이라는 이름으로 판단된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묻혀져 버린 수많은 ‘진실’에 대해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죽어서 자신의 묘비에서조차 “보안상의 이유로” 본명 대신에 ‘윌리엄 보보’라는 가명으로 묻혀 있는,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도 남편이나 아버지도 아닌 “역사의 소유물”로서 묻혀 있는 리 하비 오스월드의 운명처럼 ‘진실’은 죽음 이후에조차도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대통령을 저격하고 체포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방인’에게 저격당함으로써,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도 있었던 숱한 이야기들은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를 쏜 ‘잭 루비’ 역시 ‘대통령 암살자인 리 하비 오스월드를 저격한 영웅이 되고자 한’ 댈러스의 한 나이트클럽 사장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대통령에 대한 음모는 우연히 단기간에 성공한, 무질서한 작전”이자, “노련한 전문가와 어설픈 바보들, 반대감정과 확고한 의지, 그리고 날씨가 합작해 이루어낸 작전”이었다.

결국, 드릴로에 따르면, 세기의 대통령을 저격한 국가의 적이자 악마일 것 같은 리 하비 오스월드는 그저 지독하게 가난하고 철저하게 소외된 채 살다간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지병이기도 한 ‘난독증’처럼 사회 체제의 문제점을 ‘오역’하고 잘못 판단함으로써, ‘역사의 중심 인물이 되려는’ 욕망의 덫에 걸려 스스로 ‘체제의 도구’로 전락하고 종국에는 이용당하고 마는 가련한 이방인이기도 하다.

소설 『리브라』
소설 『리브라』에 관해 설명하는 돈 드릴로 [유튜브 캡쳐 / Elecrtric Cereal]

나아가서, 이러한 리 오스월드의 모습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의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오스월드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채 살아가든지 아니든지 간에 현대인들은 스스로가 지독한 아웃사이더임을 절감하며 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이 시대에서 나름 ‘영향력 있는 인물’(someone)이 되고 ‘역사적 인물’이 되고자 발버둥 친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개인의 욕망을 이용하여 시대와 역사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현상은 각자의 세계와 역사에서 주인공이 되길 갈망하면서 자본과 권력의 세상으로 뛰어 드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수많은 가상공간에서 눈에 띄는 악성글을 토해냄으로써라도 자신의 ‘살아 있음’과 ‘영향력’을 실험하고 보여주려는 현대인들의 다양한 모습들과도 오버랩된다.

“내 생각에 자네는 계속 거꾸로 가고 있어. 자네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그건 잘못된 거야. 자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역사 밖으로 나오는 거야. 빠져나오라고. 뛰어내려. 또 다른 차원에서 자네가 설 곳과 이름을 찾으란 말이야.”(본문 중)

우리는 각자가 제대로 설 곳과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문학 박사 / 인문학당 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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