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수저계급론’과 프레임

조송원 승인 2024.01.28 10:17 | 최종 수정 2024.01.29 10:05 의견 0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알고 살아간다.”
-베리 스위처(1937~. 미국의 전설적인 대학 미식축구 감독)-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수저계급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스위처는 주제 파악 못하고 거들먹거리는 금수저들에게 일침을 가하고자 이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스위처 본의와는 정반대가 아닐까?

애써 노력해도 3루까지 진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3루에서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금수저를 겉으로는 ‘별 것도 아닌 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선망한다. 흙수저임에 겉으로는 ‘뭐 어때’ 하며 당당해 하면서도, 속으로는 현실의 벽 앞에서 패배감에 젖는다.

금수저, 흙수저 등의 용어나 ‘수저계급론’은 사회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 자체가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란 말을 들으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다가도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니까 말이다.

미국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1941~)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했는가』(2004)에서 프레임 이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이코프가 말하는 프레임(frame)이란 ‘액자, 틀’ 등의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인지과학에서 쓰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을 뜻한다.

프레임을 구성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이다.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언어를 선택한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언어가 무엇인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이지, 참인지 거짓인지 등 객관적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프레임은 개인의 인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북한에 지원을 했다. 보수 정당은 ‘퍼주기’라며 맹공을 가했다. 자신들도 입법에 참가했으니, 자신들이 만든 법이다. 한데도 평화공존이라는 대의는 사라지고, 종북몰이는 성공하여 톡톡히 재미를 봤다.

양도세 중과와 종부세 차등과세는 더욱 강화해야 할 세금이다. 한데 기득권과 부자를 대변하는 보수 매체들은 ‘세금폭탄’이라는 용어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양도세나 종부세와 전혀 무관한 서민들도 이에 호응한다. 세금은 누구나 싫어한다. 하물며 폭탄 정도라면 더 생각할 것도 없다.

‘퍼주기’, ‘세금폭탄’ 등등이 ‘프레임’이다. 프레임에 갇히면 정상적인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에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알려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옳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 진실을 말하는 언어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고 옳은 진실도 버려질 뿐이다.

감세, 싫어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부자 감세’라고 하면? 철 지난 ‘낙수효과’를 들먹이며 무지막지하게 시행하는 현 정부의 감세에 대해, ‘부자 감세’란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프레임 이론으로 봐도 참한 언어이다.

마리 앙뚜아네트 처형을 그린 '1973년 10월 16일의 날'. Isidore Stanislas Helman 그림.

김경률 비대위원은 더불어민주당의 ‘트로이 목마’인가? 김 위원은 명품 백 사건에 대해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상기시켰다. “프랑스 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난잡한 사생활이 드러나 폭발한 거 아닌가. 지금 이 사건도 국민 감성을 건드렸다고 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와중에 사치와 부패의 상징으로 몰려,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왕비다. 어쩌면 적절한 비유이기는 하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렬에 선 김건희는 아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은 엎질러졌고, 프레임은 완성되었다. ‘김김희=마리 앙투아네드’ 윤 대통령과 김건희와 한동훈과 국힘당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프레임을 자당의 비대위원이 만들어낸 것이다. ‘검건희 특검법’ 재의결이 성사된다면, 김 위원의 기여분이 가볍지 않을 것이다.

정치란 본래 경제적 자원, 사회적 지위재, 그리고 그 자원과 지위재의 획득과 접근통로 등을 분배하는 힘을 얻기 위한 쟁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힘을 쟁취한 강자(권력자)가 ‘정의는 곧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론은 분명 일반인에게 설득력이 있다.

트라시미코스는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사람들은 신전 절도범이나 납치범, 가택 침입 강도나 사기꾼 또는 도둑으로 불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뿐 아니라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런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 사람이라 불리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올바름보다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 된다.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주장은 역사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은 논변을 통해 명예와 금전에 대한 사랑은 창피스러운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뛰어난 사람은 명예와 금전을 얻기 위한 자리라면, 통치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를 위해서는 뛰어난 사람이 통치를 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뛰어난 사람이 통치를 하게 할 유인이 없다. 통치를 통해 명예와 금전을 얻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치자가 되지 않는 데 대한 형벌을 부과해야 한다. 그게 뭐냐?

“뛰어난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했을 경우에, 그는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게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곧, 뛰어난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이러한 형벌을 두려워한 까닭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람, 곧 뛰어난 사람이 받는 보상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영혼 불사(不死)’와 사후(死後)의 보상을 든다. 종교적 해석이 아니다. 기독교가 발생하기 이전의 일이다.

논리적인 플라톤이 왜 차안의 문제를 피안의 세계로 도피시켰을까? ‘현실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이분한 플라톤의 인식구조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플라톤 철학의 현실부적합성이라는 약점을 드러내는 이유가 된다.

하여 필자는 플라톤의 ‘영혼 불사’와 ‘사후의 보상’을 일종의 프레임이라고 본다.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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