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 (24)】 숟가락 - 유진택

조승래 승인 2024.02.01 07:00 의견 0

숟가락

유진택

엄마는 들에 갈 때
문고리에 숟가락을 살짝 걸어 놓는다
문고리에서 쏙 빼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엄마는 개보다 숟가락을 더 믿는다
숟가락의 힘을 주술처럼 믿는다
그래야 마음 편해지고
종일토록 밭에서 풀을 매도
집 걱정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풀들과 전쟁을 벌이는 저녁에도
바람이 몰래 달려와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흔들어 보는 것이다

- 『시와 소금』, 2022년 여름호

유진택 시인의 숟가락을 읽다 보니 송곳니 하나밖에 없는 할머니가 반쯤 닳아 없어진 숟가락으로 고구마나 무를 긁어서 드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인은 ‘엄마는 들에 갈 때 문고리에 숟가락을 살짝 걸어 놓는다‘고 숟가락의 새로운 용도를 보여준다. ’문고리에서 쏙 빼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면서 엄마는 집을 지키는 ’개보다 숟가락을 더 믿는다‘는 것이다. ’숟가락의 힘을‘, ’주술처럼‘ 믿고 있다. 그 주술을 믿고 있으므로 외부인이 집에 침입할 수가 없을 것이고 평안한 마음으로 집 걱정하지 않고 ’종일토록 밭에서 풀을’ 맬 수가 있는 것이다.

뽑아도 뽑아도 풀의 생명력은 너무나 강인하여 엄마는 저녁이 될 때까지 ‘풀들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고작 ‘바람’만이 ‘몰래 달려와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흔들어’ 보지만 그건 호기심일 뿐, 믿음을 바탕으로 한 엄마의 주술이 유효했다.

숟가락으로 모양새가 유사한 비녀를 연상할 수 있는데 야사에 보면 쪽진머리에 꽂힌 비녀가 호신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비녀 하나로 정갈해질 수 있고, 한 몸을 보호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듯이 숟가락 하나로 소중한 집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문인수 시인의 시 ‘비녀뼈’에서 처음으로 긴 머리를 잘라내고 비녀를 뺀 할머니가 뒷머리 만지는 모습을 곁에서 보던 아들이 받은 느낌은, ‘말랑한 머릿결 속, 단단한 이 비녀! 아, ( ) 탈골이다.’라고 했다. 만약 귀가한 엄마가 문고리에서 숟가락이 안 보이면 그 절망이 얼마나 클까 싶다.

조승래 시인

◇ 조승래 시인 : ▷경남 함안 출생,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시집: 《칭다오 잔교 위》, 《뼈가 눕다》, 《어느 봄바다 활동서 어류에 대한 보고서》, 《적막이 오는 순서》 외 ▷계간문예 문학상(2020), 조지훈 문학상(2021) 수상 ▷단국대 겸임교수 역임(경영학 박사)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집 서울, 한국문인협회 이사,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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