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31)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39)

이득수 승인 2024.04.20 08:00 의견 0

자신이 내과의사이면서도 전체가 무료인 이국의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제 몸에 병이 자란 것도 모른 것이었다. 수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연기하고 치료에 전념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의사로서 자신의 병세와 장래를 짐작한 그는 치료를 포기하고 무료공연에 치중하면서 혼자 조용히 병마와 싸우며 늘 남수단의 순진한 어린이들, 악대부에 가입하여 한국가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를 연주하거나 노래하던 남수단 톤즈마을의 가난하고 소년들과 제대로 신발도 못 신던 가난한 소녀들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14. 송도와 진주여자(39)

그 순하고 착한 눈빛의 소년이 푸른 남항을 바라보며 자라던 언덕배기 마을 남부민3동의 주민, 특히 새마을지도자들과 부녀회원들이 당시 온 나라를 들끓게 한 <남수단의 성자> 이태석 신부의 신드롬의 기폭제인 일대기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울지 마, 톤즈>를 보고 눈이 퉁퉁 부어 동장을 찾아와 이태석소년이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며 성당에 가고 학교에 가던 남부민3동에서 가만있을 수 없다고 무엇인가 기념이 될 만한 사업을 하자고 말했다. 이어 주민자치위원회를 비롯한 동 산하 단체장들과 숙고하고 송도성당과 서구청과 협의하여 이태석신부의 추모제를 열고 그가 오르내리던 골목을 <이태석의 거리>로 명명하기로 했는데 그 추모제에서 낭독할 추모시를 열찬씨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변방의 한 이름 없는 시인으로서 유명인의 추모시를 쓴다는 자체가 대단한 영광인 판에 이미 이태석신부의 일대기 <울지마, 톤즈>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던 열찬씨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번에 추모시를 승낙한 열찬씨는 막상 쓰려니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윤석민동장에게 연락해 어릴 때의 일화나 이웃주민의 증언, 기타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부탁하고 <울지마, 톤즈>의 필름을 구해 여러 번 틀어보면서

“저 봐! 못 먹어서 배가 퉁퉁 부은 아이를! 또 병든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저 어미의 애잔한 눈빛을.”

“폐타이어를 구해다 슬리퍼를 만들어주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지뢰를 밟아 발 한쪽이 날아간 사람의 특별 맞춤용 슬리퍼 좀 보아.”

“저 검고 둔해 보이는 아이들이 악기는 어떻게 저렇게 잘 불며 행진은 잘도 할까? 저 검은 피부 속에 이미 음악성과 리듬감을 타고 났나 봐.”

“저 <사랑해 당신을> 노래를 좀 들어 봐. 약간 서툰 발음이지만 흑인특유의 애달픈 정서가 담겨있어. 마치 흑인영가처럼.”

하면서 애꿎은 영순씨만 눈물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이태석 신부에 몰입되기를 보름이 지나 마침내 추모시가 완성되어

“자, 당신도 좀 들어봐.”

하고

<이태석신부 추모시>

울지 마 톤즈

가열찬

절망의 땅에도 봄은 오거니

울지 마 톤즈,

딩카족 소녀 크리스티나여,

내전과 굶주림, 통곡의 땅에

상처를 치료하고 슬픔을 달래주던

수호천사 쫄리신부 귀천했지만

가난한 땅에도 꽃은 피거니

울지 마 톤즈,

악대부의 막내 열세 살의 브리지야,

신부님도 어릴 땐 너처럼 가난하여

동화책, 자전거도 친구도 없이

텅 빈 송도성당서 홀로 풍금을 치며

남부민동 언덕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삯 바늘 집 열 남매 중 아홉째지만

수단의 수바이처로 자라났거니

이제 그만 울어요, 한센씨 병 할머니,

신부님도 숨 거둘 땐 차마 엄마 못 두고 가

당신의 헐은 손발 맨손으로 싸매주며

몇 안 남은 발가락 성한 데로 본을 떠서

이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신발 지어주던

그 손으로 눈물 훔치며 떠나갔지만

황량한 사막에도 샘은 솟거니

울지 마 톤즈,

남수단의 사람들아,

내전으로 구멍 뚫린 아이들의 가슴에다

사랑과 희망의 꽃씨 심어주려고

손수 벽돌 찍어 돈 보스코 학교 짓고

이젠 총칼 녹여 클라리넷을 만들자던

그 의인을 하느님은 왜 일찍 불렀는지

대장암말기를 진단받은 그 날 밤도

<사랑해 당신을> 자선공연 열창하다

말기 암의 고통이 뼛속 파는 임종 순간

파다 만 우물과 밴드부를 걱정하며

"톤즈의 친구가 되 주실래요" 당부하면서

끝까지 미소 짓던 그가 별이 되었지만

울지 마 톤즈,

세상 모든 인류 피가 붉듯 사랑하나

쫄리신부 희생과 봉사, 땀이 얼룩진

책걸상, 병원건물, 농구골대에

그 맑은 눈빛이며 다정한 목소리가

톤즈강 강물 되어 흘러가는 하루하루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늘 다정히 톤즈마을 내려 볼 테니

저 울창한 망고나무 수풀 너머로

그의 조국 코리아와 제2조국 남 수단

그 진진한 사랑 노래 백만 년도 가리니

그 투명한 웃음소리 천만 년도 가리니.

울지 마 톤즈,

톤즈마을 사람아.

(가열찬 : 부산 시인협회 이사, 부산시 공무원문인회장역임)

열찬씨가 낭송을 하자

“괜찮은 것 같애. 좀 긴 게 흠이지만.”

“그래? 그렇지만 추모 시는 아무래도 좀 긴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구비구비 사연도 많고 눈물도 나고 그러지.”

“그런가?”

하고 팩스로 보냈는데 추모식을 하는 당일까지 연락이 없었다. 시를 잘 받았다고 연락이 왔으니 도착한 것은 분명한데 추모시의 작자를 초청할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 먼저 연락을 해보고 참석하는 것도 멋쩍어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그 하나는 이태석 신부가 다니던 송도중학교의 후배인 여중생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낭송을 하는 모양이니 굳이 머리가 허연 노인네들 불러 턱턱 갈라지는 메마른 목소리로 낭송을 하게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괜히 자신이 그 자리에서 시인으로 소개받고 싶은 공명심이 발동한 게 아닌가 싶어 쑥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문화관광시절 각종 축제의 개회식진행을 맡았을 때 지역에서 작은 감투를 쓴 별별 인사들이 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고 대중을 향해 절을 하고 손을 들어 보이는 것을 행사가 끝난 뒤 괜히 시간만 잡아먹고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하품을 하며 싫어하는 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띠다 겨우 소개가 끝났을 때 그새 도착을 했거나 참석은 했는데 명단에는 없고 그렇다고 빼먹으면 구청장에게 볼멘소리를 할 것이 빤한 전직 아무개씨들의 명단을 정병진씨가 넘겨주면 다시 소개하던 일이 생각나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열찬씨가 영순씨가 알까 보아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지만 힘들여 지은 열찬씨의 시를 버리고 중앙에서 이름이 뜨르르한 유명시인이나 교수의 시를 받아 사용한 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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