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94 가을의 노래 - 육도삼략(六韜三略) 라꾸라꾸

이득수 승인 2021.10.23 21:18 | 최종 수정 2021.10.25 14:18 의견 0
라꾸라꾸침대

제 사위 김서방은 부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점점 위축되는 바람에 어머니가 직장에 가면 두 살 어린 여동생과 아버지를 돌보며 소년가장처럼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 대하는 장모님의 제대로 된 집 밥과 든든한 언덕으로 다가온 장인이 그야말로 처갓집 말뚝처럼 좋아 단언하건데 사위의 존경과 사랑을 저만큼 받은 사람은 아마 동남권(부산, 울산, 경남)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위가 작년 5월 지금껏 파라솔 밑에 놓고 반쯤 누워 지내던 제 흔들의자가 빠개져서 버린 것을 알고 올해 여름이 오기 전에 간이침대와 닮은 이상한 의자를 들고 와

“이게 요즘 한창 뜨고 있는 피서용품 라꾸라꾸침댑니다. 아버님이 누우시면 편할 겁니다.”

했는데 등 뒤에 머리를 고일 배게까지 붙어있어 과연 편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장미와 라일락, 나리꽃과 논또꽃에 배롱나무와 과꽃, 달리아, 부용꽃이 다투어 피는 여름날엔 그야말로 이태백이 말하는 무릉도원에 사는 기분이었고 가만히 누워있어도 먼 산 능선과 산기슭에 꾸물대는 안개와 앞산의 솔숲위에 걸린 구름이 펼쳐지고 밤이 이슥하면 은하수의 별들이 쏟아질듯 가까워지기고 하고 저 먼 들녘에서 불어온 바람이 노란 가을을 싣고 와 차가운 겨울에 부려버리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비스듬히 기대기만 하면 마초가 다가와 손을 핥다 제가 잠이 들면 옆에서 같이 조는 든든한 느낌, 세상에 이런 별세상이 다 있다니 너무나 흔감한데 하루는 울산의 제수씨가 와서

“아주버님, 진짜 시인처럼 누워계시네요.”

등단 25년차로 시집만 네 권을 낸 사람에게 처음으로 시인이라고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잔뜩 기분을 내서

“이 침대는 누우면 별이 산과 들과 나무와 하늘이 다 다가오는 <하늘이 담긴 침대>지요.

하다 이내

<별이 내리는 침대>

<꿈과 몽상, 음악이 흐르는 침대>

로 부르다 마지막엔 종일 사색에 빠져 세상만사를 다 걱정한다는 뜻의

<육도삼략(六韜三略)의 라꾸라꾸>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6월에 제 엉치뼈에 악동(惡童, 암)이 전이(轉移)되어 앉고 서고 움직이는 것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하고 기우뚱거리며 앉다보니 하중이 몰리는지 그 멋진 침대의 한쪽 끝의 실밥이 뜯어지고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위가 큰맘 먹고 사준 것을 한해도 제대로 못 쓰다니...)

체면이 없어진 제가 추석에 올 사위가 신경 쓰여 철물점에서 돗바늘을 사다 비닐 끈으로 꿰매니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

과연 추석날 딸이 그걸 발견하고

“아빠...”

금방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아들도 멀리 떠나 쓸쓸한 판에 이렇게 서글프게 살아야 되느냐는 눈빛이었고 사위도

“아버님, 이것 얼마 안 해요.”

하고 금방 다시 주문하려는 걸 종일 내외가 만두하나, 찐빵하나를 일일이 손으로 조물조물 만들어 버는 돈이 아까워 아내가 한사코 말리고 저도

“꼭 사드라도 올해는 넘기고 내년 여름에 사!”

하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추석이 지나고 보름쯤 되어 기어이 집으로 새 라꾸라꾸가 도착했습니다. 제게는 한없이 편하고 아내에게는 무엇보다 말끔해 좋겠지만 왜 자꾸 마음이 짠한지, 도대체 가족이 뭐고 자식이 뭔지...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