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9-부산의 역사탐구】 찬란한 가야의 철기문화와 부산 - 박화진

박화진 부경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시민시대1 승인 2022.09.17 10:03 | 최종 수정 2022.09.19 10:19 의견 0

1. 전설에서 역사 속으로 대두한 가야

최근 고대 한·중·일 삼국 교류매개체였던 가야의 역사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이 주목된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가야가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등등이다. 그중에 건국설화가 있는 가야국은 김해 가락국(금관가야)의 수로왕설화, 고령 대가야의 이진아시왕 설화로서 그동안 전설로 전해오다가 최근 고고학 발굴 및 역사학의 연구 성과로 역사 무대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가야연맹은 소국들이 연맹을 이루어 수백 년간 존재했으나 관련 기록이 매우 적어 그 실상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가야 시대의 유적·유물들이 발굴되어 5세기 초 전기 가야연맹 해체와 더불어 수많은 가야인이 일본으로 도래하면서 고대 일본 사회에 제철기술과 스에키 토기제작 기술을 전래하여 일본 고대문명 성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가야의 역사는 문헌 기록상으로 기원후 42에서 562년까지 존재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고고학 유물로 볼 때 신라와 같이 기원전 2세기 말 이후 성립되기 시작하여, 기원후 2세기 중엽엔 소국 형태가 성립되었고 3세기경부터 김해를 중심으로 느슨한 연맹체를 조성하여 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김해 가락국이 강력한 연맹체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가야시대의 부산지방은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거칠산국의 영역으로 보인다. 이 거칠산국居漆山國은 부산광역시 동래구․금정구 일대에 있던 옛 가야 소국으로서, 『삼국사기』에는 거칠산국 외에 장산국萇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하였고,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는 독로국瀆盧國이라고 하였다. 거칠산국은 김해 및 창원 지방과 동일한 가야 연맹권에 속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고대 가야의 철기문화

한반도에 철기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점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당시의 철기는 도끼와 끌 정도의 간단한 공구류에 국한되어 아직 청동기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였으며 기본적인 생산도구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었으므로 사회적인 파급효과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한편 철기 보급은 고대사회에 많은 사회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쇠도끼는 농경지를 개발하거나 산림 개간에 있어 돌도끼와는 비교되지 안 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되었다. 쇠로 만든 농기구(괭이 삽 따비 낫 손칼)를 사용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농업생산력 향상은 늘어난 생산물의 소유를 둘러싸고 집단 간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분쟁과 전쟁이 격화되었다. 이때 철기는 또다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다. 쇠도끼와 낫은 평상시에는 농기구이지만 유사시에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다. 각종 칼·쇠살촉 등의 공격용 무기가 개발되었고 방패·투구·갑옷 등의 방어용 무기도 발달하게 되었다. 전쟁의 승패는 개인의 완력이나 용맹성에도 좌우되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우수한 철제 무기의 확보 여부가 차츰 더 중요해지게 되었다. 전쟁에 말을 이용하게 되면서 각종 마구류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도 철이 이용되었다. 고대 국가는 이러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수행되었다.

김해의 구야국은 중국, 한반도 서북, 남해안, 일본열도를 잇는 교통로 상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철을 교역하면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낙랑군과 대방군까지 구야국에서 철을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철이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풍부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철이 먼 지역에까지 거래되었음을 일러준다. 당시 내륙의 교통망이 잘 정비되었을 리가 없으므로 배를 통해서 철이 이동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거운 철광석을 배에 싣고 갔을까? 아니다. 철광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추출된 철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거래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눈에는 마치 돈이 거래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가야의 주요 교통로 낙동강 연변에는 제철공방이 여기저기 보인다. 가야의 김해와 창원부근에 철광석 산지가 집중되어 있었는데, 가야는 이런 풍부한 철광석을 배경으로 고대의 대표적인 제철 산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김해와 고령뿐만이 아니라 영남지방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가야의 여러 나라는 철기 생산이란 측면에는 인접했던 백제·왜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가야 무덤에 부장된 철기가 양적·질적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월등히 앞서 있기 때문이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고분군. 가운데 건물은 복천박물관

3. 부산의 가야 시대 유물·유적

부산지역의 가야 시대 유적은 금정구 오륜동 고분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연제구 연산동 고분군, 해운대구 반여동 고분군, 북구 화명동․덕천동 고분군, 부산진구 당감동 고분군,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고분군, 철마면 고촌리 고분군 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심 세력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복천동 고분군이다.

복천동 고분군[현 부산 복천박물관]은 가야 시대 대표적인 지배층 무덤 군으로, 1969년 주택공사로 인해 고분군 일부가 알려져 1998년까지 여러 차례 정밀한 학술적 발굴 조사를 통해 대소 120여 기에 달하는 여러 유형의 분묘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대규모 고분 유적으로서 밝혀졌다. 유적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가야 시대의 연구와 문헌 자료가 극히 부족한 우리 고대사 해명에 더없이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복천동 분묘 규모와 부장유물 등을 세밀히 검토한 결과, 서기 4세기 초에서 5세기 중엽 무렵 이 지방을 지배하던 수장층 즉 거칠산국의 왕과 그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도굴의 피해가 적어 금동관·철제갑부 등 처녀유물들을 비롯하여 9천여 점에 가까운 유물들이 발굴되어 국내를 떠들썩하게 하였는데, 특히 다양한 철기유물 출토는 가야의 우수한 철제 무기 제작기술과 전사집단․철기용도 등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가야의 판갑옷과 투구

이 고분군의 유형은 초기의 나무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부곽[副槨, 나무 덧널무덤]을 비롯해 구덩이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槨墓]․부곽[구덩이식 돌덧널무덤], 앞 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묘:橫口式石室墓] 등 실로 다양하다. 시기적으로 나무 덧널무덤 → 구덩이식 돌덧널무덤 →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순으로 변천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부장품은 고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가야 시대 당시의 생활·문화 규명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물의 종류는 토기류․철기류․장신구․의기류儀器類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토기는 종래 삼한 시대에 유행하던 와질 토기가 차츰 사라지고 서기 4세기 무렵부터 섭씨 1200° 전후 높은 불로 구운 환원염소성還元焰燒成의 매우 단단한 도질토기가 가야식 토기로 만들어졌다. 토기 종류도 매우 다양해 각종 항아리를 비롯하여 2단으로 구멍이 난 굽다리 접시, 거북․사슴․개․멧돼지 모양을 만들어 붙인 원통형 항아리 받침대, 각양각색의 토기(신선로 달걀 오리 등잔 신발), 말머리 모양 뿔잔, 복숭아 모양 잔 등 같은 특이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일본서기》에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에게 보낸 물품의 이름 중에 덩이쇠 40매가 보인다. 철을 얇게 두드려서 만든 덩이쇠는 일종의 철 소재로서 이것을 가공하여 각종의 철기류를 만들 수 있다. 백제․신라․가야 지역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으며 일본열도의 무덤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가야 지역에서는 김해의 대성동, 부산의 복천동유적에서 수십 점이 출토되었는데 부장품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화폐 기능 및 철기 소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본열도에서 만들어진 철기 중에는 가야 지역에서 전해진 덩이쇠를 가지고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여럿 알려져 있다.

가야인의 신발.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53호 무덤에서 발굴된 신발 모양 토기로 현대인의 샌들과 비슷함.

 

4. 고대사 인식에 대한 반성

우리는 한국고대사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통칭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는 562~660년까지의 약 98년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삼국시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 이전의 한반도에서 생활했던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삼국이란 용어는 고려인의 역사 인식[김부식, 『삼국사기』]에서 시작된 것인데 과연 적합한 역사관일까? 고조선, 부여, 가야, 발해 등이 배제되어 우리 민족의 역사 경험을 공간·시간상으로 축소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삼국시대론의 허점이 제기되면서 가야에 대해 언급되기 시작되었다. 조선 중기 한백겸은 고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 공존 사실을 언급해 후일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수봉의 ‘고조선-4국-고려’[『지봉유설』], 안정복의 ‘4국 시대’[『동사강목』]를 비롯하여 정약용도 ‘가야는 해운을 잘 이용했으므로 동시대의 신라보다 훨씬 더 발달할 수 있었다’[『강역고』] 라고 근대적인 가야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광복 이후 역사학의 성과에 의해 발해사에 대한 역사 인식이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야사는 오랫동안 잊히거나 무시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에 임나일본부설 등의 영향으로 역사가 왜곡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되거나 축소된 채로 약 50년 가까이 지내왔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달로 가야의 수준 높은 유물들이 풍부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일본에서의 기마민족설[한반도 남부 기마민족에 의해 일본 고대문명이 건설되었다는 설]과 북한의 가야사 연구 등으로 인해 가야사에 대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부산에는 원시시대는 물론이고 삼한 시대의 변한 지역, 고대의 금관가야와 관련된 지역으로 많은 유물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동래구 복천동고분군 유적은 매우 풍부한 유물들로 그동안 잊혀져 왔던 가야국가의 면모를 재생시켜주었다. 우리 지역 역사와 관련된 유물유적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두시길 부탁드리는 바이다.

 

박화진 교수
박화진 교수

◇박화진 교수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교 대학원 일본사학과 박사학위 취득(문학박사)
▷현) 부경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저서 『부산의 역사와 문화』(2003), 『해양도시 부산이야기』(2018), 『해양도시 부산의 역사와 문화』(2019)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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