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당선, 박근혜 당선과 무엇이 다른가

트럼프 당선, 박근혜 당선과 무엇이 다른가

조송원 승인 2016.11.10 00:00 | 최종 수정 2017.03.13 00:00 의견 0

제45대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놀랍다고들 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제45대 대통령 당선 확정이. 특히 TV만으로 세상을 보는 장삼이사들이 TV를 보며 웃으면서 놀란다. 놀랄 수는 있다. 그러나 웃을 일일까? 나는 더 놀랐다, 4년 전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경악했다.

힐러리가 당선되리라는 예측의 근거는 호오(好惡, 좋고 싫음)를 떠나 미국 일반 시민들의 지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트럼프의 당선에 나 또한 놀란다. 그러나 놀란 방향이 좀 다르다. 트럼프의 지지 기반은 백인 중하층이라고 들었다. 이들은 1대99 사회에 대한 절망, 자유무역에 의한 실업과 세계 경찰국가로서 자국민을 희생시키는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것이다.

자, 좀 이상하지 않는가? 미국 유권자들의 과반수가 돌파리란 말인가? 진단과 처방이 영 와닿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중산층을 몰락시키고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드럼프 종류의 기업인들이고, 그런 시스템을 정책적으로 보장한 정당이 공화당 아니었던가.

어쨌건 공화당의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이 사건(?)을 발생시킨 추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포스트 트루스 정치(Post-Truth politics)'에 주목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포스트 트루스 정치’란 "상세한 정책과는 관계없이 감정에 호소하고, 사실에 입각한 반박은 무시하고 자기 유리한 점만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토론이 이루어지는 정치 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개념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 마린 르 펜의 급부상, 러시아 푸틴의 권력 강화와 유지, 필리핀의 두테르테 살인 정치, 콜롬비아의 평화협정 거부 등 세계적으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포퓰리즘 파워의 도도한 저류가 바로 이 ‘포스트 트루스 정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다는 판단이다.

<이코노미스트> 2016년 9월 10-16일 판의 상세한 논설에 기대어 거칠게 소개한다. 트럼프는 '포스트 트루스 정치’의 선도적인 옹호자이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증명서가 위조 되었고, 이슬람 국가(IS)를 세웠다는 턱도 없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철면피한 주장이 벌 받기는커녕 엘리트 파워에 감연히 맞서는 정치인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포스트 트루스 정치’가 과거와 다른 점은, 진실이 위조되거나 의문시 된다는 게 아니라, 이차적인 중요성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 정치인의 거짓말은 그릇된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같은 ‘포스트 트루스 정치’ 정치가는 엘리트들을 확신시키려 하지 않는다. 표적 유권자들을 신뢰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편견을 강화하려 할 뿐이다. 사실이 아니라 느낌이 ‘포스트 트루스 정치’ 선거 운동에서는 중요하다. 하여 반대편들의 불신은 ‘우리 대 그들’의 징표가 된다.

왜 생겨났을까? 분노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고 뒤처졌다고 느낀다. 책임 있는 엘리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데도 말이다. 미디어의 진화도 ‘포스트 트루스 정치’을 부추겼다. 뉴스원이 파편화하자 거짓말, 루머, 가십이 놀라울 속도로 퍼져 세상을 원자화했다. 널리 공유된 거짓말은 진실의 외양을 갖출 수 있다. 선의의 보도 관행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 보도에서 ‘공정성’을 추구한답시고 종종 진실을 희생하고 엉터리 균형을 유지한다. NASA 과학자의 ‘화성에 생물은 살지 않는 것 같다’라는 말과 시시한 교수의 ‘화성은 외계인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을 ‘공정’하게 보도한다면, 진실은 진실로 여론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헬조선'은 우리가 두 번씩이나 저지른 판단 잘못의 당연한 후과이다. 재능은 양날의 칼이다. 그 재능이 공공선에 쓰일 때는 어머니의 부엌칼이지만, 사적 이익에 봉사하면 강도의 피 묻히는 칼 저리 가라다. 그래서 대통령의 도덕성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큰 그릇 작은 그릇, 다 소중하고 쓰임새가 있다. 그러나 종지가 대중을 먹일 밥솥감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면 도덕성의 결여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함을, 일개 사이비 교주 딸의 교시를 받는 이의 정체성을 몰랐을까, 적어도 여론 주도층들이. 걸주(桀紂)의 폭정은 걸주 혼자서 가능했을까? 폭군의 전횡을 음으로든 양으로든 뒷받침해온 ‘머리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우중을 넘어선 민중이라 하더라도 생업에 오로지해야 겨우 사람 노릇할 수 있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하여 ‘세상을 보는 창’이 필요하다. 언론인, 지식인, 과학자가 그 창 역할을 한다. 무산자로서 가진 자에 복무해야 하는 서글픈 살림살이라 한계는 있지만 헬조선의 탄생에는 이 창이 너무 비뚤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체제라도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면 모순이 누적되어 드디어는 폭발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이 쌓이고 쌓여 트럼프 같은 인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조만간 미국이라는 나라는 근본적인 폭발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폭발했다.

폭발은 가치중립적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폭발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잿더미가 될 수도 있다. 곪은 종기는 터트려야 한다. 고름이 피가 되는 법은 없다. 덮고 덮어 수술로도 감당할 수 없어 사지 하나를 잘라내야 할 지경에 이르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까발린 종기에서 고름을 빼내고 치료하는 과정과 그 결과에 따라 미국의 서민들과 우리의 민중들 삶이 결정되리라.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지만 내 작은 머리의 헤아림으로는 어째 내일이 미덥지가 못하다. 답답하다. 하여 하늘을 본다. 우주를 생각한다. 이 우주에 태양계가 아니라 은하계가 1000조 개, 2000조 개. 10억 광년의 거리, 넓이. 우주의 나이 137억 년, 지구의 나이만도 46억 년.

티끌의 무게만도 못한 육신이 해 뜨면 증발해 버리는 풀잎에 맺힌 이슬만큼도 못한 인생을 살면서 무슨 걱정을 할 겨를이 있으랴! 필요하다면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고’. 신문 꼭 읽고, 주위 두루두루 사랑하며 그냥 하루 게으름 없이 살자, 다짐한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