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시대의 정치문화

"포스트 트루스가 아무리 극성을 부리더라도 진실의 시대가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김진현 승인 2020.07.07 15:25 | 최종 수정 2020.07.07 15:35 의견 0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탈진실) 시대

바야흐로 세계는 지금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들어서 있다. 세계화와 급격한 기술의 변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함께 각국의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상황은 복잡하게 얽혀 예측이 어려워지고 더불어 100년 만에 찾아온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지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미래를 불확실하게 여기고 불안감을 키우게 되었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극심한 삶의 불안감을 지니게 되어 걱정과 염려, 후회, 인지 부조화, 좌절과 우울의 감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고, 이것이 탈진실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진실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나 진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게 되는 경향이 높아졌다.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또는 post fact)란 진실이 다른 고려사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부여받고, 그 결과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대중이 수용적인 경향을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등장한 배경은 기존의 공적기관과 미디어에 대한 깊은 불신, 냉전이 종식된 이후 등장하게 된 정치적 양극화와 포퓰리즘, 그리고 인터넷 발달로 인한 미디어 생태계의 근본적 변화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포스트 트루스 현상을 촉진하는 것이 미디어 환경의 변화인데 페이스북, 유투브 등 소셜 미디어의 급격한 확산으로 인해 온라인상으로 유통되는 정보가 나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이러한 온라인 환경에서 서로 상충 되는 정보가 증폭함에 따라 이용자의 혼란과 불신이 커지고 이로 인해 정보 자체에 대한 신뢰가 계속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신문·방송과 달리, 생산하는 정보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거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인터넷 매체가 새로운 정보원으로 주장하면서 급격히 등장하고 있으며 인터넷 매체를 유통시키는 플랫폼 유지업체의 자정작용 부족, 가짜뉴스와 같이 각종 거짓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탈 진실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포스트 트루스 현상은 이제 우리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정치에서의 포스트 트루스 현상

포스트 트루스가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정치현장에서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를 선정한 2016년은 미국의 트럼프 후보가 기성 미디어의 예측을 깨고 대통령에 선출된 해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동안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많은 말과 허풍, 왜곡을 일삼았고, 기성의 언론이 앞다투어 팩트 체크를 제공했지만,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포스트 트루스 정치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공신력 있는 신문이 트럼프 발언의 진위를 따지고 사실과 다른 대목들을 계속하여 지적했지만, 결과적으로 투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선거 결과에서도 드러나듯이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자신만의 생각, 그들이 느낀 분노와 소외감, 위기감 등을 트럼프가 대변해 준다는 점만을 중요시했다.

정치에서의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politics)는 주로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적 호소가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기만하는 주장, 감정 섞인 주장이 탈진실로 승화되려면 이를 믿고 따르는 대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미국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탈진실 선거운동은 후보자인 트럼프 개인의 유별난 개성과 독특한 개인기 때문만이 아닌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수십 년간 쌓여온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변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공신력을 바탕으로 객관성과 균형감 있는 정보 전달을 목표로 삼았던 미디어가 급격하게 쇠락하게 되고, 비슷한 이념성향과 가치지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뉴스를 접하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가 일상화되었으며, 정치이념의 극단화와 분열정치의 확산, 하나의 진실과 하나의 보편적 진리는 존재하기 어렵고 모두가 상대적이다 라고 하는 미국식 상대주의의 부활, 경제 격차의 심화, 제조업에서 밀려난 노동자 계층의 허무주의 등 미국 사회는 탈진실이라는 바이러스에 취약한 기저질환을 지난 수십 년간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정치에서의 포스트 트루스 경향은 미국뿐 아니라 여러 국가의 정치에서 공통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 또한 미국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사회는 초고속인터넷 환경을 국가와 기업이 선도적으로 구축하면서 온라인을 통한 여론 형성과 선거운동을 누구보다 앞서 경험하였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 세력인 노사모를 중심으로 온라인 선거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러한 온라인 선거활동의 경험은 정치의 세력화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온라인상의 공간은 여론 주도권을 노린 치열한 정치공방의 장이 되었고, 보수와 진보 정당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세력이 온라인에 뛰어들어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지지와 반대 등 여론 형성에 나섰다.

그동안 시민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던 인터넷 공간이 정치세력의 여론 주도권 쟁탈 무대가 되면서 그로 인한 부작용도 심화되었다. 트위터와 카카오톡,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소셜 네트워크 기반이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가짜뉴스를 생산 유포하게 되었고 익명성을 무기로 상대에 대한 비논리적인 옹호와 근거 없는 비방 등이 난무하게 되는 공간으로 오염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온라인이 탈진실의 주 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서의 표현의 자유

세계 각국이 탈진실을 촉발시키는 가짜뉴스와의 전면전을 선언하고 있고, 앞다투어 이를 방지 또는 근절하고자 하는 정책들을 내놓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온라인에서 난무하는 가짜뉴스를 잡기 위한 첫 출발은 무엇일까? 먼저, 문제를 직시하고 인식을 바로잡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또한‘가짜뉴스’라는 표현 대신에 ‘허위 정보’ 또는 ‘조작된 정보’라는 단어 등 보다 정확하고 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유는 가짜라는 말에서 풍기는 가벼움으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단순한 일탈 정도의 인식을 벗어나게 하여 보다 더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유럽에서도 가짜뉴스란 용어 사용을 지양하고, disinformation(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 misinformation(실수로 인해 발생한 잘못된 정보), malinformation(유해정보) 등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쓰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발간한 〈저널리즘, ‘가짜뉴스’ 그리고 허위정보: 저널리즘 교육과 훈련을 위한 핸드북〉에서도 가짜뉴스라는 용어가 그 자체로 모순이라며 대신 허위정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인터넷이 익명과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공간이라는 속성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여론 형성과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온라인 여론 공간이 오염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조작될 경우 현실 정치현장에서도 실질적인 피해를 겪겠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이 정치권에 대해 갖게 되는 기본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가 되고, 그로 인해 사회 통합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면서 디지털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유럽외교협회는 탈진실 시대에, 우리가 진실을 지키면서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 첫째, 가짜뉴스가 발견되는 즉시 이를 시정하도록 하는 규제를 전통 미디어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 기업에도 부과해야 한다. 둘째, 모든 뉴스 생산자의 비즈니스 모델, 특히 재정이 투명해질 때, 우리는 진실을 지킬 수 있다. 셋째, 뉴스의 질과 책임성을 담보하는 공영 언론이 중요하다. 넷째, 뉴스와 정보처리에 관한 시민교육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시민들은 뉴스의 저작권, 복수의 출처, 뉴스의 게시 일자, 뉴스의 현실성 등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진실(truth)

사람들은 자주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실수와 오류를 범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존재는 아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조작에 의한 정보에 의해 노출되어 있다면 거짓이 기선을 잡기도 하겠지만 쉽게 지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다보면 진실은 결국 속살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대중의 포스트 트루스 정치에 대한 열정은 쉽게 식지 않고 온라인상의 가짜뉴스에 대한 전쟁 역시 상당한 기간 지속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 트루스가 아무리 극성을 부리더라도 진실의 시대가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에 대한 진실(truth)이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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