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② 산사나무에는 붉은 귀신이 있다

손현숙 승인 2021.05.10 10:55 | 최종 수정 2021.05.12 18:56 의견 0

산사나무에는 붉은 귀신이 있다

                                              손현숙

 

조각별이 모여 사는 꽃잎 한 장이다 어떤 적막이 보낸 수신호일까, 목소리는 선명한데 얼굴 가뭇하다 안부를 묻고 비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어디서 말을 끊어야 할지 몰라 입술 사이로 흘리는 치음은 전생에서 온 나쁜 습성이다 해와 달은 몇 번째 내 속을 들락거렸을까 헛것처럼,

산사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손가락을 치켜 올리자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손바닥에 꽃잎을 받아내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와 이별 중이다 끝과 끝이 닿아서 무슨 모양을 이룰 것인가, 겨울나무의 기립에 대하여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 이별은 그 어느 부근쯤에서 왔지, 싶다

과거로 돌아가는 빨간약을 삼킬까, 고민했던 흔적, 나는 거기서 살기나 살았었는지 별점을 치러 문을 나서다 말고 전생을 지금 또 살고 있다는 생각, 너는 그때도 등을 보였고, 또 서성이면서 산사 꽃그늘 아래로 몸을 들인다 새들이 자꾸 봄을 물고 와서 물방울 같은 무덤을 짓고 간다

<시작메모> 
홍산사나무에 꽃이 피었다. 작은 꽃잎들이 오종종 모여서 마치 조각별이 모여 사는 꽃잎 한 장 같다. 아니다, 기어이 불러오고 싶은 어떤 기억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저편에서 서성이는 당신은 저리도 고운 모습으로 환생해서 내게로 왔다. 어쩌면 그것은 귀신일지도 모르겠지만, 괜찮다. 잠시 꽃으로 돌아온 당신과 오늘, 여기서 물방울 같은 무덤을 짓고 실컷 살아봐도 좋겠다.

- 현대시학 특집. 2020. 11-12월호

꽃이 만개한 홍산사나무 앞의 필자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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