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⑨ 아기와 눈을 맞춰

손현숙 승인 2021.06.26 11:41 | 최종 수정 2021.06.28 14:37 의견 0

아기와 눈을 맞춰
                         손현숙 
                                


아장거리는 아기의 걸음마로 
조용하던 골목이 와글거린다 
엄마는 어떻게 아기의 몸속에 
자기를 저렇게 새겨 넣을 수 있었을까? 
무릎 꿇어 까꿍, 팔 벌리는 엄마 품속으로 
아기는 무작정 몸을 허문다 

강아지 한 마리 꼬리를 흔들자
함께 천년쯤 살았던 사이처럼 
아기는 강아지를 향해 뒤뚱 기운다 
강아지는 어떻게 소리도 없이
아기의 몸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갈기를 세우며 
기어이 닿고 싶은 그곳, 
지금 나는 부드럽게 무릎 꿇어 
아기와 눈 맞춰 
잔잔해지고 싶다 

세상보다 넓은 아기의 품 안에서 
무작정 몸을 허물어 말랑해지는 일, 
사랑이 사랑 쪽으로 몸을 기울듯 
세상 속으로 순하게 나를 끼워 넣는 일, 
나는 어떻게 아기의 몸속으로 
나를 살며시 밀어 넣을 수 있을까? 

-2011. 문학사상. 가을호


<시작메모>
골목길에서 아기가 아장거린다. 공기가 들리고 기분 좋은 와글거림이 시작된다. 아기가 넘어질까 내 두 팔과 다리는 엉거주춤 기울어진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방인. 다왔다, 아기는 엄마의 품속으로 와락, 무너진다. 남김없이 허물어져서 위대해 보이는 이 광경은 언젠가 내게도 있었지, 싶다. 어떻게 하면 나도 아기처럼 연해질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절대로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천진이 아닐까. 노자도, 장자도, 니체도 예수까지도 온 힘을 다해서 천진을 지키라고 했던가. 이제는 억만금을 주고서도 얻을 수 없는 그것이겠지만, 나는 조금은 천진한, 그래서 살짝 주책인 당신이 좋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