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④ 꽃밥 - 엄재국

손현숙 승인 2021.05.22 13:17 | 최종 수정 2021.05.25 17:47 의견 0

꽃밥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엄재국 시인의 미술작가 데뷔 전시 작품 중
엄재국 시인의 미술작가 데뷔 전시 작품 중
엄재국 시인의 미술작가 데뷔 전시 작품 중

<시작메모>

엄재국 시인의 미술전시에 다녀왔다.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하는 전시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입이 딱, 벌어졌다. 거짓말처럼 눈 앞에 펼쳐진 스케일에 압도당했다. 무거운 둔기로 일격을 당한 느낌이랄까. 설치미술부터 유화 그리고 아크릴화 등등 시인의 작품들은 모두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카오스를 온몸으로 감각하게 했다. 하나의 대상을 부수고 비틀고 다시 세워서 또 다른 지점으로 몰고 가는 힘은 시인이 시를 향해 몰입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엄재국 시인의 예술은 모두가 시였고, 모두가 시가 아니었다. 해석을 거부하는 이상한 자유로움은 눈을 감고도 건너가게 하는 입체의 힘을 보여주었다. 시가 세상의 무늬를 언어로 불러오듯이 그의 그림들은 시면서 또 시를 지우는 새로움의 행위예술이다.

시에서도 시인은 아궁이에 불 지펴서 따뜻하게 지어주셨던 할머니의 밥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시의 행간 어디에도 그립다는 말은 없다. 다만, 할머니가 지피는 불꽃들은 모두가 꽃이고, 그 꽃들이 익혀주는 밥이야말로 꽃밥,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밥이라는 것을 잔잔하게 묘사할 뿐이다. 나는 혼자 생각한다. 엄재국 시인의 모든 예술은 그가 건너가고 싶은 또 다른 형식의 시가 아닐까. 뒷모습이 단단하고 아름답고 눈물이 많은 이 남자의 예술을 응원한다.

엄재국 시인의 미술작가 데뷔 전시 작품 중
엄재국 시인의 미술작가 데뷔 전시 작품 중
엄재국 시인의 미술작가 데뷔 전시 작품 중

 

손현숙
손현숙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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