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17) 수승대授勝臺 가는 길, 채영조

손현숙 승인 2024.02.17 08:00 | 최종 수정 2024.02.17 11:56 의견 0

수승대授勝臺 가는 길

채영조

삶은 매 순간 순간마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한 기다림이 만남이거나
이별로 마무리되어도
또 다른 기다림이
먼 발치에 서 있었다.
흰 눈이 가는 길을 가득 채워
이정표를 분간할 수 없는 날
매서운 겨울바람에
자세를 한껏 낮춘 거북바위는
눈썹이 하얗게 세어 있고,
변치 않겠다는 맹세
정釘으로 바위에 새겨
한 천년 기다리면
그대!
거북바위 속에 잠든
내 사랑 깨우러 오지 않겠소.

채영조 시인

시집 《아름다운 추억들은 찬란한 만큼 슬펐다》을 읽었다. ‘빛남출판사’ 2019.

수승대는 속세의 근심과 걱정을 잊을 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화자는 그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을 생각한다. 절정에서 저점을 향해 가는 우리들 생의 수순처럼 “생”에서 “멸”을 바라본다. 그날, 이정표초차 분간이 어려운 폭설 속에서 시인은 냄새로 길을 찾아야 했으리라. 그렇게 한 발짝씩 걸어서 기어이 닿았던 거북바위. 천년을 넘어서도 변치 않는 지고함에 정釘으로 바위를 쪼듯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긴 말, 만남과 이별 사이 기다림은 처연해서 아름답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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