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9. 임제와 신희①

박기철 승인 2024.03.20 10:24 | 최종 수정 2024.03.20 10:25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9-1. 이상한 제도를 만든 임제

도대체 넌 누구니? 도무지 요즘 사람들 같지 않아. 도저히 알 수가 없네. 아무튼 어쨌든 여하튼 무지하게 옛날 사람들 같아. 혹시 원시인 아니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그래도 난 원시인은 아니거든. 이래뵈도 문명인이야. 우리들이 만든 문명은 매우 넓게 퍼졌었지. 나는 인류가 이룬 문명들 중에 하나의 문명을 만든 거지. 내가 옛날 사람인 건 맞아. 여기 이 구역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먼 과거로부터 온 사람일 걸. 난 기원전 약 15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야. 확실한 년도는 아니야. 대충 대략 대강 그렇다는 거야.

어쩐지 아주 옛날 사람같더라니… 그런데 넌 어디서 살던 사람이었어. 갈색 머리에 얼굴이 허연 게 저기 유럽에서 살았었나?

그러기도 했었지. 그러니까 우리 동족들은 원래 유럽 동부에 해당하는 폰틱카스피해 대초원에 살았었어. 카스피해 양 옆쪽에 널리 펼쳐진 대초원에서 유목을 하며 살았지. 그러다 그곳에서 살 형편이 못되어 대초원을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어. 어느 길다란 강 유역에 자리잡았어. 그 강이 인더스강이라고 하더군. 그 곳에는 원래 살던 사람들이 있었어. 우리보다 먼저 앞선 인더스 문명을 이루며 살았었나봐. 수공업도 발달하고 주변 나라들과 교역을 하면서 살았다지. 널찍한 대중목욕탕도 있고 하수시설까지 갖춘 아주 세련되고 정돈된 계획도시였다지. 나름 선진문명을 이루고 살던 게 분명했어. 그런데 그 곳의 기후가 변하게 되었대. 가뭄이 들고 사막화가 진행되어 살 형편이 못되어 동쪽이나 아래 쪽으로 옮겨가 살게 되면서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그리 북적거리는 도시가 아니었어. 그래도 우리가 살기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었지.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우리 그곳에 살던 토착 원주민들을 제압했어. 우리한테 무릎 꿇며 살도록 했어. 그들의 선조가 이루었던 문명은 인더스 문명이라고 하는데 인류의 4대 문명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문명이었어. 그들한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거대한 왕궁 같은 것도 없었대. 엄청난 노역으르 짓는 거대한 신전 건축물도 없었다지. 그냥 평화롭게 서로 오손도손 잘 살았나봐. 그러니 그들은 국방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대. 당연히 전쟁 싸움을 잘 못했어. 그런 인더스 문명의 터전에 우리가 들어갔을 때 거기 살던 토착 원주민은 얼마 없었어. 말을 타며 금속 칼을 지닌 우리는 싸움에 능했지만 우린 싸우지 않고 그들을 얕잡아 보며 제압했지. 우린 갈색 머리에 흰 피부를 가졌는데 그들은 검정 머리에 검정 피부를 가졌었지. 아무리 그들이 과거에 앞선 도시 문명을 이루었다고 해도 우리가 보기엔 하찮게 여겨졌지.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기거나 정복했던 건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가 이주하면서 저들이 우리 앞에 무릎 꿇거나 아니면 저들 스스로 물러나게 된 거지. 물러난 자들은 저 멀리 동쪽이나 남쪽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어. 그들이 살던 인더스 강 유역의 땅은 완전히 우리 세상이 되었어. 드디어 우린 우리 방식대로의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어. 이를 위해 우선 제도를 정비했지. 그건 매우 엄격한 신분 계급 구분에 따른 제도였어. 카스트라는 이름의 그 제도는 아직도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졌지. 너도 많이 들어 본 제도일 거야.

카스트 제도! 알지. 그걸 네가 만들었다고? 요즘 없어지지 않았나? 고리타분한 옛날식 제도라고… 쓸데없이 그런 걸 왜 만들었지?

쓸데없는 게 아니라 쓸데있어 만들어야 했어. 내가 만들었다기보다 내가 우리 무리들의 지도자였을 때 만들었지. 지도자이자 권력자인 내 생각을 반영해서 만들었으니 내가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카스트 제도는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어. 하나의 제도가 3000년 넘게 이어진다는 게 대단하지 않아? 지금 여기 와서 보니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제도를 만든 건 사실이야.

어떻게 똑같은 사람을 네 등급으로 구분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하도 유명해서 네 등급 신분의 이름까지도 알아.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와우! 신희 정확하네. 맞아. 학교에서 공부 잘 했나 보네. 그 네 계급이야. 어떻게 구분되는지도 알겠네?

학교 다닐 때 들었는데 하도 어이가 없는 제도라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해. 제사를 지내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 왕족 귀족이나 무사들로 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 농업 상업 공업 등에 종사하며 세금을 내는 바이샤, 세금은 안내도 죽어라 일만 하는 노예계급인 수드라. 이렇게 넷 아니야?

거참! 우리가 너무나 좋은 제도를 만들었나? 이렇게나 아직도 잘 알고 있다니! 정말로 고귀하며 순수하다는 뜻의 카스트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선가? 농담이야. 네 단계보다 더 세분화시켜 60개까지로 구분된 신분계급인 카스트 제도도 있는데 일단 네 가지 신분이 기본이야. 위로부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는 얼굴이 허연 사람들로 이주하여 들어온 이주민이고, 얼굴이 검은 수드라는 원래 살던 토착 원주민이었지. 난 제사을 관장했기 때문에 가장 높은 브라만에 속하자.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해서 아직 우리가 차지한 땅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수드라가 되었던 거지.

내가 알기로는 이 네 계급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라며? 가까이 접하면 안 될 정도로 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들었지? 그런 사람들은 주로 전쟁 포로였다며? 요즘은 불가촉천민에게도 달리트나 찬달라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고도 들었는데… 하여튼 넌 이상한 제도를 만들었어. 못됐어. 너. 그런데 여기서 넌 이름이 임제지만 실제 내 이름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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