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30)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38)

이득수 승인 2024.04.19 08:00 | 최종 수정 2024.04.24 15:40 의견 0

스토리텔링집 이야기가 끝나자 이내 연말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재식 계장이 아슬아슬하게 동장승진에서 밀려나 올해 하반기 7월에는 틀림없이 승진할 것이고 잘 하면 박기도, 정병진씨도 연내 승진희망이 보이며 어떤 변수가 생기면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식사 중에 각자 사무관이 되면 박창훈씨를 잘 챙기라고 하니 그러마고 했다. 노래방까지 마치고 택시를 타는데

“국장님, 아버지라고 생각할게요. 가끔 놀러 오시고 혹시 잔심부름 시킬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14. 송도와 진주여자(38)

스토리텔링집의 평판이 좋아 잔뜩 기분이 업(up)되어 있는 판에 또 일거리가 들어왔다. 남부민3동장으로 나가있는 윤석민동장이 전화가 와서

“존경하는 국장님, 축하합니다. 스토리텔링집이 지금 서구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아이구, 윤 계장 오랜만이네.”

하다

“미안. 내가 벌써 동장 나간 것을 깜빡 잊고...”

옛날 그 어렵던 자치생활과장을 지낼 때 주무계장인 경리계장을 지내며 점심과 술자리를 챙기며 말동무가 되어주던 시절을 떠올리는데

“아이구, 형님. 괜찮습니다.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지요.”

“그래. 좌우지간 반갑네.”

하자

“저어, 국장님!”

하고 본론을 꺼내는 데 그게 또 아주 매력적인 일감이었다.

윤석민 동장이 근무하는 남부민3동은 송도아랫길을 따라 공동어시장을 지나 남항등대로 들어가는 방파제입구의 거대한 냉동 창고들과 맞은편의 등대시장주변의 마을로 구성되어 송도아랫길이라 불리는 해수욕장의 입구였다. 거기다 그 많은 냉동창고의 거대한 벽에 푸른 바다와 넘실대는 파도에 수많은 어족(魚族)을 그려놓아 가끔씩 크고 작은 어선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붉고 흰 두개의 남항등대를 빠져나와 먼 바다로 떠나가면 낄룩낄룩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떴다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퍽 정감이 있는 마을이었다.

일제의 남빈항매립으로 부산의 시가지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몇 가구의 어부들이 살아가는 호젓한 마을이었으나 해방과 6.25를 맞으면서 귀환동포와 피난민이 나지막한 산비탈에 판잣집을 지으면서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마을이었다.

아직 송도아랫길이 개설하기 전 지금의 남부민동과 암남동의 경계인 곡각지점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곧장 시퍼런 파도가 넘실대던 시절에는 해안선을 따라 바로 송도해수욕장에 가는 송림공원이나 거북섬에 이를 수가 없어 지금의 송도윗길을 통하여 천마산자락하나를 넘어야 암남동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6.25이후 인구가 유입되면서 천마산의 끝자락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바로 시퍼런 남해바다와 마주치는 이 언덕배기주변, 옛시청과 영도다리와 자갈치를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에서 아스라한 송도로 넘어가는 끝자락에는 시내 한가운데에 두기 힘든 몇 가지의 복지시설이 들어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수많은 전쟁고아를 수용하여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를 가르치는 <소년의 집>이었고 시각장애인을 수용하여 안마기술을 가르치는 <라이트하우스> 또 정신지체장애자를 보호하는 <천마재활원등>이 들어서고 천막학교인 송도중학교, 송도상고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부모 밑에서 신문배달, 껌팔이, 구두닦이를 하는 언덕배기 아이들을 가르쳤고 몇 개의 교회와 성당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토개발의 차원에서 시퍼런 바닷물이 조석으로 드나드는 곡각지 절벽아래를 정비하고 일부를 매립하여 선원들을 양성하는 부산해양고등학교를 개설하여 수많은 바다사나이를 배출하다 영도로 옮겨가고 지금은 자그마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 가난한 마을에서 자라난 소년 중에서 아주 특별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남수단의 성자>로 불리는 이태석신부였다. 언덕배기의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때에 따라 부두에서 노동도 하고 장사도 하며 살아가면서 단 하나 자식만 부자인 판잣집에서 자라난 어린 이태석은 몽롱한 눈빛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언덕배기 길을 올라 미사가 있는 날은 물론 없는 날까지 늘 성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조용한 아이였는데 차츰 자라나면서 착하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 신앙심이 깊은 데다 음악은 물론 미술과 체육을 잘 하고 친구들과 잘 사귀며 특히 가난하고 힘든 친구들과 이웃을 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감싸주는 인정이 많고 감성이 뛰어난 아이였다. 거기에다 기타를 잘 치고 노래를 잘 해 성당 찬양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고등학생이 된 태석이는 큰 형이 이미 신부가 되어 신앙심이 깊은 집안이기는 하나 여전히 가난한 집안사정을 감안 신설대학으로서 학비가 싼 인제대학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지만 가난한 이웃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려던 어릴 적의 꿈을 버리지 못해 의사를 버리고 다시 신학을 공부해 신부가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젊은 신부 이태석은 드디어 자신의 꿈을 전파하기 위하여 내전과 기아와 질병으로 지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안한 나라, 가장 많은 사내들이 죽고 다치며 굶주린 어린이들이 채 자라나지도 못 하고 배우지도 못 하고 온갖 병에 시달리며 젓가락처럼 말라죽거나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죽어가는 열대의 밀림, 남수단을 근무지로 지원했다. 커다란 망고나무 외에는 무엇 하나 신통한 것이 없이 뜨거운 햇볕아래 오염된 강물이 푹푹 썩어가고 종일 내전의 총소리와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는 땅에 천막을 치고 판잣집을 지어 간이병원을 세우고 병든 사람과 아이들을 진료하고 깨끗한 물을 먹도록 계몽하고 성당을 지어 하느님의 복음과 전파하고 음악을 가르쳤다. 그렇게 남수단의 성자로 검은 피부의 수단인과 가족처럼 밀착되어 가면서 학교와 교회를 넓히고 악대의 악기도 확충하고 학용품도 구하려 모국을 방문하여 어머니와 부모형제를 만나고 옛 친구들과 만나 같이 기타를 치며 불우시설에서 무료공연을 하다 의료시설이 좋은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는 가족의 권유로 종합검진을 받다 이미 상당히 진척된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자신이 내과의사이면서도 전체가 무료인 이국의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제 몸에 병이 자란 것도 모른 것이었다. 수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연기하고 치료에 전념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의사로서 자신의 병세와 장래를 짐작한 그는 치료를 포기하고 무료공연에 치중하면서 혼자 조용히 병마와 싸우며 늘 남수단의 순진한 어린이들, 악대부에 가입하여 한국가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를 연주하거나 노래하던 남수단 톤즈마을의 가난하고 소년들과 제대로 신발도 못 신던 가난한 소녀들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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