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1. 갑철과 술녀(1)

박기철 승인 2024.04.28 16:29 의견 0

11-1. 한많은 삶과 한많은 죽음

거참 나…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뭐야? 여기 관리자들이 나를 뺑뺑이치게 했어. 괜히 날 왔다리 갔다리 시키더니 지금 막 여기 들어 왔어. 왜들 나한테 그러나 몰라? 지금 이 방은 내가 전에 있던 방이 아닌 거 같은데. 전에 나랑 같이 이야기 나누던 자영이란 여자는 무지하게 이뻤는데… 그런데 넌 누구야? 생긴 게 우리네랑 완전히 다르네. 피부는 적갈색이고 머리카락은 뽀글뽀글하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나는 너같은 사람을 살아생전에 본 적이 없고 여기서도 본 적이 없어. 그런데 너 여자야? 남자야? 보아하니 유인원처럼 생기긴 해도 사람 같기는 한데… 어째 나랑 종족 자체가 아주 많이 다른 거 같다. 근데 왜 풀이 확 죽어 있어. 뭐라고 말 좀 해봐.

여기서도 너처럼 얼굴 허연 놈들이 있네. 다시는 안 보고 싶었는데 실망이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도 나한테 못살게 구는 허연 놈들은 아닐 테지. 난 여기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래도 여기가 내가 살아생전에 살던 곳보다는 좋은 곳 같은데. 나는 풀이 죽어 있는게 아니라 하도 고생을 해서 힘들어서 그래. 근데 나는 너처럼 얼굴 허연 놈들만 보며 소름돋아. 소름끼쳐. 네가 아무리 잘 생겼더라도 그래. 나한테 너네들은 다 악마처럼 보여. 너네들은 우리들 생긴 거 가지고 뭐라 그러지만 나는 너네들 하는 거 보고 뭐라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아.

한(恨) 많은 생을 살았구나. 너 생긴 거가지고 뭐라 해서 미안해. 나랑 너무나 달리 생겨서 그만. 나도 살면서 산전수전 공중전 지하전 다 겪었지만 너만큼 한이 쌓이지는 않았나 보다. 근데 너는 뭐 그리도 살아생전에 한이 많았다는 거야?

나는 살아서도 한이 많고 죽어서도 한이 많았어. 일단 내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을 들어봐. 조용히 가만히 귀기울이며.

“제발 내 시체를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주시오.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어느 것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이 지옥을 만든 당신네 백인이 없고 먼저 가 있는 우리 종족들이 있는 곳. 당신들은 우리를 죽이면서 지옥에 가있다고 하지만, 천만에요.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천국일 겁니다. 나는 여태껏 교회에 나가 억지로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에 기도했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우릴 죽인 당신들의 그 십자가에 매달린 악마를 저는 영원히 증오합니다. 당신들은 십자가를 내밀면서 죽인 우리 섬사람들을 모독하고 회개하라고 했죠. 그런 모습에서 어찌 사랑과 용서를 깨우치라는 건가요. 하지만 그 증오는 이제 여기서 놔두고 잊겠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그 증오도 이제 필요 없습니다. 이제 비로소 저는 자유로워진 겁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당신들이 믿는 종교에서 늘 강조하는 사랑과 평화와 용서라는 건 대체 우리들에겐 해당되지 않은 건가요?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냥 바다에 화장하여 뿌려주십시요. 제발!”

이런 나의 유언이 참으로 처절하지 않아? 오죽하면 나 살던 곳을 지옥 같은 세상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얼굴 허연 놈들이 고귀하에 떠받드는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을 악마라고 했을까? 너는 내가 살던 세상을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그런데 저 얼굴 허연 악독한 놈들은 내 유언 마지막에 했던 마지막 소원마저도 들어주지 않았어.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냥 바다에 화장하여 뿌려주십시요. 제발!” 이렇게 유언하며 죽었는데 난 죽어서도 죽은 게 아니었어. 구천을 맴돌았었지. 놈들은 죽은 내 몸을 해부하고 박제로 만들더군. 난 내가 살던 섬의 마지막 원주민이었으니 생물학적 보관 가치가 있었나봐. 죽은 날 해부한 이유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목적이었다는군. 내 시신을 파헤쳐 해부해 보니 유인원처럼 생긴 나 같은 여자도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는 실망했겠지. 내가 인간이었다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놈들은 해부된 내 몸 겉가죽 안에 뭔가를 잔뜩 쑤셔 박아 넣고는 날 박제로 만들어 박물관 같은 곳에 전시해 놓았어. 나쁜 놈들! 쳐죽일 놈들! 날 인간 비슷한 희귀 동물로 여겼던 거지. 그렇게 난 1876년에 죽었는데 구천을 맴돌다 1976년에야 내 유언대로 화장되어 황천길로 가게 되어 여기 오게 되었지. 죽은 지 백년 만에 내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진 거야.

자세한 내막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참 살면서 한이 많기도 많았겠구나. 살아서도 한이 많았고 죽어서도 한이 많았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봐. 네가 살았을 때 사정이 어땠는지…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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