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생태 이야기 (47) 한해를 보내며 - 상선약수(上善若水)

김 해창 승인 2022.12.30 15:27 | 최종 수정 2023.01.01 13:35 의견 0
[사진=박홍재]
[사진=박홍재]

2022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나를 돌아 본다. 예전에 『노자(老子)』를 읽고 메모한 것을 다시 펼쳐본다. 올 한 해 나는 삶의 본질에 어느 정도 충실하였는가?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전후상수, 항야)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弗去.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 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제2장>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아는 것은 더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선을 선으로 아는 것은 선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있고 없음이 함께 있으며, 쉽고 어려움이 일을 이루는데 함께 있고,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함에서 생기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여봄에서 나오고, 말과 소리는 서로 화합하고 앞뒤는 서로 이어진다. 늘 그렇다.
이렇듯 성인이 무위(無爲)의 일을 할 때는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은 자랄지언정 공치사를 하지 않고, 낳지마는 소유하지 않으며, 행하지만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대저 공에 머물지 않기에 이룬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뜻을 한번 곱씹어 본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음양처럼 상반된 것이 있지만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름 비교를 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반대 같아 보이지만 조화를 이루는 게 세상의 이치인가보다. 그래서 현인은 표나지 않게 일을 하는데 그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절로 느끼게 하는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공을 내세우면 그 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마태복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자선이나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친구나 모임에서 뭔가를 내놓으면서 생색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색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교만과 상통한다고 한다. 즉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생명에서부터 재능(탤런트)이 모두 하느님의 선물인데 마치 온전히 내 것인 양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불경한 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을 보면 절로 자라고, 가축이 새끼를 낳지만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땅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하고, 가축을 소유하고, 심하면 노예처럼 사람을 소유한다. 이 점에서 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구별하고, 구분하고, 차별하는 일을 해선 안 될 것 같다. 남녀노소가 서로의 존재의 모습을 인정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있고 없는 것,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은 것. 이런 것도 생각 나름이다. 이 세상에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이것은 어떤 자리, 어떤 물질, 아니 인간 존재 자체가 그런 것 같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 다른 삶이 있는 것 아닐까. 길고 짧고, 희고 검고, 높고 낮은 것이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생각 나름이라는 것.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게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궁극적으로 미추(美醜)와 선악(善惡)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고, 보기 나름이며, 삶은 이러한 다양한 가치나 형상이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규정짓기에 익숙했던 나의 한해를 반성한다.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爲無爲,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제3장>

똑똑함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 싸우지 않게 할 수 있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게 할 수 있다.
탐낼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이로써 성인의 정치는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채우게 하며, 지나친 의지를 누그러뜨리고, 뼈를 강하게 하는 것이다.
늘 백성들이 너무 똑똑하게 하거나 욕심을 내지 않게 하고, 재치가 있는 자라도 무리하게 일을 도모하게 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우리사회는 지식을 존중하기에, 긍극에 학벌사회를 만들고,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입시, 학력경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극단적인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재벌이나 자본, 돈을 지나치게 숭상함으로써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취하겠다는 도둑놈심보가 어느새 마음 한곳에 자리잡고 있다. 

자본주의사회는 끝없이 욕망을 자극한다. 실생활에 필요하지 않은 고급 사치품을 구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하고, 이를 갖지 못하면 마음 한곳이 허전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제대로 된 정치라면 이러한 헛된 욕심을 좀 버리고, 내실을 기하며, 너무 하고자 하는 마음을 좀 줄이고, 몸을 튼튼히 함으로써 스스로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비록 똑똑하다고 해도 성과 위주의 일을 펼치는 일은 자제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사회엔 통용되기 어려운 생각 갖지만 오히려 오늘날 사회가 이렇게 된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러한 무위(無爲)사상에 대한 재인식이 절실한 때다.

이러한 것은 욕망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인 E.F.슈마허는 “간디가 말했듯이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타당하다”며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虛其心(허기심), 實其腹(실기복)’에서 사람의 필요를 충족한다는 것은 어느 수준까지를 말할까? 영국의 로버트 스키델스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부자가 펴낸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How much is enough?)』(2012)는 인간의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자, ‘바람직한 미래상’의 제안이기도 하다. 이들 부자는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먼저 희소성을 욕구(wants)가 아니라 ‘필요(needs)’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무엇보다 기본재(basic goods)가 중요한데 건강·안전·존중·개성·자연과의 조화·우정·여가 등이 포함된다. 이 같은 기본재는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좋은 삶이라고 강조하며, 나아가 이러한 기본재야말로 개인적 행동은 물론 정치적 행동의 적합한 목표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노자의 사상과 일치한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기본재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정책으로 첫째,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조직을 갖춰야 한다(不貴難得之貨). 둘째, 일하라는 압력을 줄여야 한다(弱其志). 셋째,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 을 실현할 필요가 있다(實其腹). 넷째, 소비하라는 압력을 줄일 필요가 있다(不見可欲). 다섯째, 광고 줄이기가 필요하다(不見可欲). 여섯째, 경제적 통합을 강력히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수출성장형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 내발적 발전이 필요하다)(虛其心)는 것이다.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필요성을 존중하는 정치·경제로 나아가야 함으로 배울 수 있다. 올 한 해 내가 하려고 한 일들이 나의 지식이나 탐욕을 드러낸 일은 아닌가 반성한다.

上善若水. (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악, 고기어도)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제8장>

최고의 선은 마치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도 간다. 그러기에 도(道)에 가깝다.
옳은 곳에 머물고, 깊은 못과 같은 마음을 갖고, 착하고 어진이와 더불어, 올곧은 믿음을 말하고, 올곧은 정치를 하고, 옳은 일을 능히 하며, 적절한 때에 움직인다. 굳이 다툴 일이 없기에 걱정할 일이 없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말은 익히 들은 말이다. 물의 특성은 남에게 이로움을 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기 않기에 다투지 않고, 남들이 꺼려하는 곳에도 자신을 낮춰 내려간다. 즉 하방연대(下方連帶)가 생각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향하고 물은 모여 궁극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쇠귀 신영복 선생이 말한 하방연대. 강한 것,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연대가 아니다. 그것은 추종과 타협이자 결국 흡수합병으로 귀결될 뿐이다. 모든 사회운동의 연대방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대만이 희망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진정한 연대는 하방연대입니다. 쇠귀’. 

김해창 교수

최고의 선은 곧 도(道)이며 도는 물과 같다는 말이다. 옳은 곳에 머물고, 생각을 깊이하고, 착하고 어진이와 더불어, 믿음직한 말을 하고, 올곧은 정치, 옳은 일을 하며, 때를 안다. 그러기에 다툴 일에 나서지 않고 그런 오해를 받지 않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낮추면서도 절로 좋은 일을 해내는 힘이 도이다. 그리고 도의 발현대상은 자연이며, 이 세상에서는 민초이다. 하방연대의 힘은 민초의 힘이기도 하다. 올 한 해 나 자신은, 나아가 우리 모두는 제대로 하방연대를 했는지 한번 되돌아보자.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