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세상 22 - 보물찾기】 해운 풍류 - 신종석

해운 풍류 / 신종석(소설가)

인본세상 승인 2023.08.14 11:03 | 최종 수정 2023.08.15 10:58 의견 0

해외여행이 활발하지 않았던 8~90년대까지만 해도 ‘해운대’가 우리나라 최고 인기 신혼 여행지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지금도 대한팔경 중 한 곳인 달맞이 고개를 끼고 있는 해운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전국의 데이트 명소로 누구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고속철도를 이용해 수도권 사람들도 동네마실 가듯 쉽게 나들이하는 곳이 된 지 오래다.

독일의 공영방송사 ZDF가 세계 3대 해수욕장이라 평가할 정도로 외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아 관광객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줄줄이 찾는 곳이 되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촌을 대표하는 도심 속 관광 휴양지로, 잠깐이나마 우리들의 풍류를 누릴 수 있는 한류의 중심 발원지가 틀림없는 듯하다.

봄이면 동백섬 쪽에서 피어오르는 해무는 키 큰 소나무와 백사장을 휘감고 돌아 와우산을 덮어 온 천지를 하얀 목화솜 이불로 덮은 듯 포근하게 만든다. 바다 건너 이기대 쪽에서 보면 마치 해운대 일대가 피어오르는 전설 속 무릉도원을 보는 듯하다. 으스름한 가을밤, 와우산 미포 꼬리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은 엘시티 허리를 타고 동백섬과 광안대교까지 연결되어 가히 밤하늘의 영롱한 천상 세계를 보는 듯 환상적이다.

해운대라는 지명은 신라 삼대 천재 중 한 사람인 최치원이 말년에 전국을 유람하다 바닷가 소나무와 백사장 사이에 피어오르는 해무를 보고 경치에 감탄해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에서 따 붙인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해운대 동백섬 정상에 풍류를 설하고 한류를 예견한 고운 최치원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점점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1,200년 전 고운 최치원 하면 한류의 원조라는 데 이견이 없을 줄 안다. 당나라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토황소격문이란 명문을 써 내로라하는 당나라 지식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토황소격문을 읽은 황소가 놀라 정신을 잃고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신당서에서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당나라는 지금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국강병의 문화선진국이었다. 중국이 가장 자랑하는 삼대 발명품인 나침판 종이 화약이 모두 당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나라 시성 두순학과 교류하며 최치원이 쓴 시를 보고 억울하게 죽은 쌍녀분 영혼이 나타나 시를 주고받고 친해져 세 사람이 한 이불속에 누워 하룻밤을 보냈다는 뒷이야기, 결국 두 여인은 천년의 한을 풀고 성불했다는 설화는 당․명․청 시대에 이어 지금까지 중국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 가히 방탄소년단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류의 원조는 원효다. 원효는 최치원보다 200년 전 해운대에서 가까운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불광산 척판암에 앉아 천리안으로 중국의 화엄성지 당나라 종남산 태화사가 천재지변으로 무너져 천명의 대중이 매몰될 것을 예견하고, 급히 깔고 앉은 판자에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球衆”이란 문구를 써 당나라 종남산 천태사로 던졌다는 이야기는 당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설화의 발설은 우리나라가 아니고 중국 당나라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효가 던진 판자의 글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球衆”을 보고 목숨을 구한 천명의 대중이 신라 땅 삽량주(양산) 천성산(천명이 성불) 화엄벌에서 원효에게 가르침을 받고 일시에 992명이 성불을 하고 나머지 8명은 달구벌(대구) 팔공산에서 성불했다고 하는 전설은 당나라 설화다.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어린이 역사 동요, 아름다운 강산에 금수강산으로 시작하는 “역사는 흐른다”에 나오는 가사다. 당나라에 가지도 않은 원효가 당시 세계 최고 문화선진국인 당나라에서 칭송을 받았던 이유는 원효의 저서『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때문이다. 이 두 경전으로 원효는 당 태종의 명을 받고 천축에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온 최고의 법승 현장(서유기의 삼장법사)이 쓴 인명학의 잘못을 지적 보완했다. 들리는 말로는 현장이 천축에서 가지고 온 경전을 해석하지 못하고 산경散經으로 두었는데, 원효가 65세 681년 풀이해 금강삼매경론이라고 이름 붙여 황룡사 백고좌에서 강설했다고 한다. 론論은 보살이 쓴 책에만 붙이는 존칭이다. 인도의 고승 진나보살이 화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모두들 입을 모은 사건이었다. 그 후 원효는 분황지진나芬皇之陳那란 존칭을 받았다. 신라 서라벌 분황사의 진나란 뜻이다.

원효의 처남인 문무왕과 김유신은 3만의 병사로 매소성(경기도 연천)에 주둔한 세계 최고의 강병 소정방, 설인귀 휘하의 20만을 이 땅에서 완전히 쫓아냈으니 당나라가 신라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원효와 최치원 두 선지식은 모두 우리의 현묘지도玄妙之道 홍익인간 사상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마음 일심一心, 즉 자기중심의 이기에서 벗어나 함께하는 이타, 이는 곧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 사상이 아닌가.

사실 원효와 최치원은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에서 인정한 한류의 원조다. 일본 교토에 고산사高山寺란 일본이 자랑하는 고찰이 있다. 고산사에서는 원효와 사촌 아우인 법성게法性偈 의상을 대명신大明神으로 모시고 있다. 심지어 의상을 사모한 선묘 낭자의 탱화를 1,300년간 보존할 정도니, 더 덧붙이는 것은 실례다.

최치원이 지었다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은 1082년 고려 대흥왕사에서 판각되어 중국과 일본에 배포되었는데, 중국으로 건너가 재간행 되었고 다시 필사되어 일본 고산사에 전해졌다. 나중에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을 바탕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과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蔵経』이 근대 활자로 나왔다는 사실은 한류가 일본 문화 속에 깊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에는 나라 안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는 유불선의 근원이 되고 종교가 아닌 우리의 삶이라고 했다. 이제 선지식이 설한 우리의 현묘지도 풍류는 인류의 삶이자 한류란 신문화로 면면히 흘러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해운대에서 해마다 꽃 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해운대엔 우리나라 사람 반, 외국인 반이다.


蜀葵花 촉규화

                                        최치원

 

寂寞荒田側 적막한 황무지 한 모퉁이에
繁花壓柔枝 다복하게 꽃 피어 가지 휘었네
香經梅雨歇 장맛비 그치니 향기 가볍고다
影帶麥風㿲 보리 바람결에 그림자 한들대네
車馬誰見賞 수레 탄 이 뉘라서 보아줄까
蜂蝶徒相窺 벌과 나비 떼만 날아든다네
自慙生地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堪恨人棄遺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슬퍼할만 하군

 

신종석 

◇ 신종석 

- 소설가 

- 장편소설 : 『원효』 『일심』, 『금고기』, 『나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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