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서평】 일상의 중력에도 편편翩翩 떠다니는 말이 있으니, 감쪽같은 시심詩心 - 정훈

장소시학 승인 2023.06.10 11:48 | 최종 수정 2023.06.12 10:09 의견 0

일상의 중력에도 편편翩翩 떠다니는 말이 있으니, 감쪽같은 시심詩心

- 최영순 시집 『아라 홍연』, 하순이 시집 『조금은 질투』, 이영자 시집 『달리는 꼴찌』
 
정 훈
 
 
시를 쓰는 일만큼 부질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별 까닭이나 실속도 쓸모도 없이 한가한 말놀음 끝에 내놓게 되는 언어의 뭉치란 대체로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서 바람처럼 날려버려도 아무렇지도 않고, 때때로 손아귀에 쥐고서 속을 뭉클하게 하기도 하겠지만 그 심사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져버릴 운명이기에 자취 남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시가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자갈이나 풀처럼 우리 삶에 별다른 존재 의미를 던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시가 있되, 그 시란 게 한갓 정신과 감성의 고조를 위한 풀무질일 뿐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밀물되어 덤벼드는 희로애락의 파도에 휩쓸리기 십상인 우리에게 내던져진 ‘시적 감흥’에 지나지 않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시’란 이름의 손님 얼굴을 다시 그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시가 어떤 목적이나 방향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시는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인간사회의 단면을 구성한다.
 
시에 대한 모든 담론들은 시의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에서 파생되어, 시란 이름으로 드러나는 문화현상의 살갗을 해부하거나 진단하는 작업으로 마무리를 짓게 된다. 여기서 절대로 변질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시’가 지닌 이미지와 의미 사이의 길항과, 그런 시적 형상이 시인의 세계관에서 어떤 방법으로 나오게 되는지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일상에서 존재의 본원이나 실체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런 관념의 바탕에서 실존적인 체험이 주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은 비단 특정한 주체나 구체적인 상황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일상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실존과 실존을 둘러싼 환경이 만들어내는 무대다. 다만 주체의 감각에 포착된 세계만이 일상의 영역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신분이나 사회적인 자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사회관계와 사건 혹은 공간이 중요한 거점이자 매개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일상영역이란 이렇게 구성되고, 만들어지고, 경계를 짓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상은 변하지 않는 틀 속에서 경계만 진동하면서 안팎을 넘나드는, 존재를 구속하는 한계지점이자 막힌 우주인 셈이다. 이렇게 바라본다 해서 숙명론에 빠질 위험은 별로 크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를 규정짓는 시공간의 구속력이 제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처럼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존재의 울타리 밖을 언제든지 포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자유가 제한된 일상의 너비와 높이를 마음대로 조절하게 되고, 이로써 자신이 발 딛은 자리에서 미처 보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던 진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시는 그런 마음의 표정을 담아내기에 최적화된 언어형식이다. 그렇기에 시는 궁극적으로는 쓸모없지만, 쓸모없음 속에 감춰져 있는 사유의 과정과 의식의 귀결에서 응시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말할 수 있다. 나란히 ‘시와시학’에서 올해 펴낸 최영순 시집 『아라 홍연』, 하순이 시집 『조금은 질투』, 이영자 시집 『달리는 꼴찌』에서 그 세계를 엿보고자 한다.
 

1. 수식 없는 일상의 날씬함, 혹은 천연天然한 말의 누설에 대하여 - 최영순 시집 『아라 홍연』(시와시학, 2022)

 
최영순의 시에서 발견되는 언어의 경쾌함은, 시인이 일상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철학이 어떻게 몸에 배어 가락처럼 나타났는지 물어보는 일을 덩달아 요구한다. 그는 군더더기 없이 삶을 살아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군더더기 없는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이 말은 시인의 삶에 대한 단정이나 평가가 아니다. ‘군더더기’란 사전에 나와 있듯 쓸데없이 덧붙은 것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삶이나 글에서 군더더기를 걸러내는 일은 삶과 글이 본디 지닌 길을 잊지 않고 간직해서, 나머지나 잉여의 기웃거림을 단박에 잘라내는 일과 같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도 사념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종 길을 잃거나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던 길에서 쉽사리 샛길로 빠지면서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사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은 자신의 목적과 방향성을 늘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 그리고 희망에 따라 삶의 형식을 만들어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우연한 사건이나 기류에 휩쓸려 맴을 돌거나 뒷걸음질을 하는 게 보통의 삶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라도 세계를 향해 분노하거나 허무에 빠지지 않고 담백하게 세상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생활세계를 영그는 존재도 있다. 최영순 시인이 그런 부류이거니와 그의 눈에는 곁가지들이 달라붙지 않고 중심이 무엇인지 삶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담박한 의식으로 붙잡아 두려는 마음씨가 들어 있다.
 
비가 와서/비가 와서/고추 익어 갈라지고/어영부영 심은 참깨/줄기 부러져 썩고/고구마는/고라니 와서 뜯고/산돼지 파 디비고/그래도 손주 좋아하는/옥수수는 풍년
-「일기」
 
거추장스러운 이파리들이 떨어져나가고 줄기만 오롯한 형체의 위 시가 그렇다.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이 비가 와서 상하거나 망가졌지만 하나는 온전히 남았으니 풍년이다. 시인은 예상치 않게 찾아온 불청객들이 어질러놓은 장면에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결국 인생이란 모든 것 다 버리고서라도 하나라도 성하게 남는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삶의 기쁨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을 하는 듯하다. 시제인 ‘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나날이 기록하는 삶의 표정에는 때로는 궂고 그늘진 빛들이 드리운다. 이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수가 많다. 물론 존재가 숙명적으로 처하게 되는 바탕에는 비단 즐거움이나 행복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시인이 체험하는 속에서 돌연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르는 것들이 부지기수이고, 보잘 것 없거나 작은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시각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갈라진다. 시인은 언젠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물의 질서를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연애세포 깨워 주는 달달/달빛 꽃받침/홍실홍실 짝짓기 좋은 날/홍연이 품속에/곤충의 꽃잠//사랑비는 또륵 또르륵/참개구리 참방참방 물놀이/썩강에 연방/줄줄이 태어나겠다
-「아라 홍연」 가운데서
 
표제작이기도 한「아라 홍연」에서 구사한 시어의 구성과 표현에서 시인이 풍경과 존재를 바라보는 눈길을 더욱 잘 확인할 수 있다. ‘아라 홍연’은 단지 풀이거나 꽃일 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홍연이 홍연이게끔 피어올린 내력과 숨겨진 내막을 상상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형상화한다. 특히 “연애세포 깨워 주는 달달”, “사랑비는 또륵 또르륵”과 같은 표현은 말의 경제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시적 정취와 시인이 아라 홍연을 보고 잡아내는 이미지의 적절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아라 홍연과 그것에 달라붙어 공생하는 온갖 생물들이 이루어내는 풍경은 비단 생명이 주는 아름다움에만 발현되지는 않는다. 존재가 의미를 갖추거나 새로운 존재성을 발견해내는 눈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알맞은 배경과 뜻을 찾아내는 데서 생기기 마련이다. 지천에 돋아나는 식물을 묘사하는 일과 그 식물을 다시 보게끔 마음의 나침반을 돌려세우는 일은 서로 비슷하지만 갈라진다. 시인은 아라 홍연에서 단순하면서도 욕심 없는, 그러니까 순박한 시심詩心 한 자락 얹어놓는다. 이러한 느낌은 “자르고 붙이고/고치고 고쳐/시근시근 줄 줄줄/시 구이”하는 시작詩作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미덕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세상살이 치장하지 않고 날씬하게 숨 쉬며 소박하고 거리낌 없는 말들의 자리 새겨 넣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에서 비롯한다. 이것이 최영순 시의 세계가 시작하는 바탕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2. 하얀 마음에 그리는 글 손짓 하나- 하순이 시집, 『조금은 질투』(시와시학, 2022)

 
이 세계는 한정 없고 다양한 요소의 질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제도나 관습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다거나 무엇이 그르다는, 한마디로 쉽사리 단정하기 힘든 부분들이 숱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선이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시간 속에서 인간 행위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말미암아 추론하거나 판단한다. 여기에는 옳은 방향과 그릇된 방향을 추동하는 개인과 사회의 의식과 분위기, 그리고 물질적인 발전에서 비롯하는 사회 기울기의 각도에 따라 매듭을 짓게 되는 정치 경제적 단면들이 오롯하다. 시가 이러한 역사와 관습에 벗어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시는 어쨌든 인간에 대한 찬미나 열광과는 거리가 먼 영역에 놓여 있는 정신문화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시는 기울어지거나, 비틀어지거나, 비스듬히 놓이거나, 혹은 결여된 것들에 대한 탐문이요 드러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이 세계와 불화하고 저항한다. 불화와 저항의 방법은 시적 형상화나 시인의 표현에 따라 언제든지 다채롭게 펼쳐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세계와 대결하는 양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대결과 긴장의 양상을 보이더라도 결국 시는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지닌 속내와 심성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으며, 또한 그런 아기자기하고 가냘픈 것들에게서 얼마나 생명의 진실을 캐낼 수 있는지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하순이 시는 우리에게 한 가지 물음을 던진다. 모든 이들이 행복해지는 날까지 우리가 갖춰야 할 생각의 지향은 어떠해야 하는지 시인은 시로써 묻는다.
 
삼월은 한 해가 시작되는 달//코거품이 말라붙은 것들은/맨발로 앉았고/빗물에 부지런히 애벌 씻은 것들은/용의검사 준비에 바쁜 아침/구름 닮은 종소리 퍼지면/덜겅덜겅 월요 조회시간 끝
-「너덜겅」 가운데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날의 들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이 떠오르는 시다. 화자는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학기의 시작이 주는 설렘과 반가움을 느낀다. 아이들에게 삼월은 어떤 의미를 안겨다줄까. 아이들도 아마 선생님처럼 호기심과 설렘, 한편으로는 걱정도 일었겠다. 어쨌든 맞이하게 된 새로운 공부의 현장을 몸소 겪는 마음이란 익히 상상할 수 있듯이 산만하면서도 가슴 부풀어 오르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학교로 여기저기 들어온 작은 존재들이 모여 있으면 어딘가 모르게 꿈과 희망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활기차다. 이 활기찬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구분 짓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시공간의 마당이다. 들쭉날쭉, 바른 듯 어긋나 있는 생명들의 입김들 속에서 어우러지는 다정하면서도 정겨운 소리는 “덜겅덜겅 월요 조회시간”처럼 다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아우성 되어 벅차오르는 것이다. 여기에 생명의 질서와 방향을 점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 두는 것, 그래서 제각각 지닌 순한 생명의 손짓들을 에누리 없이 거두어갈 수 있는 마음들이 모일 때 행복은 시작되는 것이란 사실을 시인은 느꼈는지도 모른다.
 
평생교육원 시창작반에 다니는 정원이 엄마/시 쓸 소재 없다고 키보드 타닥타닥//빛내리 초등하교 3학년 정원이/일기 글감 없다고 디지몬 연필 톡톡
-「글쓰기」
 
“시 쓸 소재”와 “일기 글감”이 없어 하릴없이 손가락만 놀리는 이들에게조차도 소설보다도 더욱 크고 많은 사연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이들은 단지 스스로를 삶의 중심에 가져다 놓으려 하지 않는 겸손만 가득할 뿐이다. 백짓장처럼 소박하고 맑은 심성이 그득하기에 짐짓 글쓰기가 불러일으키는 치장이나 포장이 두려운 이들이다. 한편, 시인은 글쓰기를 앞두면서 생활의 여러 가지 생각조각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머리를 쑤셨을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보며 글을 골몰하는 존재의 그늘진 윤곽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글은 한꺼번에, 순식간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물은 끓는 점 이상 올려/한소끔 식혀서 내려야” 제맛(「시는 끓는다」)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점점 붉게 타올랐다 공중에 휘젓는 바람 잠시 마시고 내뱉는 신산한 삶의 기침들이 녹아 있어야 참된 글이 되겠다는 속마음을 점쳐 본다. 시든 글이든 허식虛飾에 빠져 스스로 허둥대지 않고, 속을 비우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서는 깨끗하게 손놀림할 줄 아는 솜씨가 오히려 본받을만한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시로써 증명한다. 이것이 아이의 마음으로 하늘에 대고 부르는 시인의 마음이요 모든 사랑하는 존재들이 늘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3. 마주하는 길과 등 뒤로 보내는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리는 팡파르 - 이영자 시집, 『달리는 꼴찌』(시와시학, 2022)

 
길을 걷다보면 밀려오는 것들을 모조리 삼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숨 차 오르기에 그것들은 얼추 삼키다가도 다시금 내뱉어야 하는 지난 시간들이기에 그렇다. 오르기 위해 땀 흘리며 뛰어가는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평탄하든 어쨌든 마주하며 지나쳐야 할 삶의 통로이자 반드시 지나쳐야 할 길목이기에 건넌다. 인생을 길로 비유하는 일은 흔하다. 아마도 싫든 좋든 한번쯤은 겪고 건너야 하는 존재의 다리 같은 것이어서 그럴 터이다. 이영자의 시에는 그러한 삶의 길목을 거닐면서, 혹은 달리면서 반추하는 삶의 요소들이 가득 차다. 가만히 앉아서 골몰하는 생각들도 의미가 없지 않지만, 몸을 일으켜 세워 두 다리를 움직이면서 스쳐 지나는 세계의 결을 고스란히 매만지는 일, 그 일만큼 생명과 존재가 부딪치며 굉음을 내거나 불꽃을 터뜨리며 온전히 맞이하는 경험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존중심의 발로이며 더는 가지지 못할 이 세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에 지나지 않다. 그런 속에서 스스로 곱씹고, 보내야 하는 존재와 새롭게 떠안아야 하는 사물의 얼굴을 어루만지게 된다.
 
긴 시간 짧은 시간도/그 사이 어디를 갔다 왔는지/알 수 없어//가끔은 전화벨 소리가 나거나/흔들어 깨우는 바람에/아침이 깬다/달아나는 꿈을 잡으려고/쫓아가면서/끄집어낸다//눈도 안 뜨고/조금만 더
-「지금 아니면」
 
의식과는 무관하게 흘러 지나가는 것들을 미련을 두고 잡으려 하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다. 시인 또한 꿈결에서 깨야 하는 순간에 아쉬워 마냥 머물고만 싶어 하는 순간을 기록했다. “달아나는 꿈을 잡으려고/쫓아가면서/끄집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마음 한편에는 천천히 지나가는 초침의 속도가 메워져 한꺼번에 갉아먹는 시간의 손아귀를 떨치려는 의지가 녹아 있다. 그것은 한때 나를 달콤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졌거나 응시했던 손과 눈들이었겠으며, 봄날 산들바람에 온몸을 맡기면서 거닐던 오솔길의 따뜻한 흙 내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무언들 지나간 모든 것들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보내면서 맞이하는 마음 또한 본능처럼 간직하고 있는 존재다. 수용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떠나보내며 아쉬워하다가도 제게 다가오는 풍경과 존재들에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시인에게 길은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환대하면서 끌어안는 매개이자 수단이 된다.
 
황강을 거슬러/합천호로 꽃잎처럼 달린다/운동장을 밀어내는 출발 신호/물소리 글 소리/아이들 이야기 소리/벚꽃같이 어울려/계속 사이 흐르고 길 위로 구르고/반환점 앞두고 은근하게 높은 평지/벚꽃 핀 길 아니면 더 솟을 땀방울
-「볼 것이 많아」
 
달리면서 보는 것들이 많다. 시인은 “황강을 거슬러/합천호로 꽃잎처럼 달”리며 온갖 소리를 듣고, 또한 온갖 자연의 몸짓을 본다. 여기에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달리면서 그 아름다운 세계의 풍경을 둘러보며 길 위를 지나는 무리들이 내는 소리들도 들어 있다. 이런 모든 소리와 빛들이 시인을 사로잡는다. 마치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잊은 듯 봄날의 삼매경에 빠진다. 시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사로잡는 세계가 있다. 가끔 고독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의 등짝을 훔쳐보며 슬픔에 빠져 들기도 하겠지만, 세상은 마냥 시간의 검은 그늘 속에서만 흐느끼지는 않는다.
 
엎드려 있다가도 고개를 들어 파란 공중을 향해 벙긋 웃으며 달려드는 것들도 지천이다. 행복은 아마도 이런데서 오지 않을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기쁨은 먼데 있지 않다. 몸으로 바람처럼 맞으면서 스치는 모든 것들이 시인의 몸속 세포 하나하나에 눈짓을 한다. “왜 뛰냐고/누가 뛰래/몸이 고생하는 일을 왜 하냐고/몰라”(「멈추지 않을 거야」) 자문하는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신도 모르면서 자신이 앞장서서 행하는 마음이 있다. 이 세계를 온몸으로 지나가는 일만큼 쓸쓸한 일도 없지만, 온몸으로 맞이하면서 새롭게 자각하는 삶의 의미들도 모르는 사이에 쌓이고 쌓여 새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그 지혜가 비록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신만이 오롯이 느끼며 만지게 되는 아름다운 형체로 자랄 때 보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풍경과 사물들, 그리고 지난 시간들과 마음 부풀면서 맞이할 새로운 시간들을 미리 눈여겨보는 즐거움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그래서 살아가는 일은 고여 있기만 한 자신의 몸과 정신을 바짝 붙들어서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다. 이영자 시인의 시에서 그런 낌새가 가득하다. 이 또한 세계의 들러붙은 소중한 생명들이 한 목소리로 울리는 팡파르이자 합창인 것이다.
 
무겁고 심각한 세상에서 말들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우리 생활세계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시인은 그런 말들을 모아 정선하고 수선해서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존재다. 하찮은 사건들과 행동, 그리고 생각들이라 여기는 것들을 가만히 들춰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과 아름다움의 조각보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을 느끼면서 그냥 지나쳐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기나긴 밤의 고독을 지나, 진창길처럼 무거운 생의 등허리를 아프게 매만지고 난 뒤에 찾아오는 애상을 지나면 어김없이 새벽이 오듯, 고함과 비명과 날 선 아우성을 다독거리며 재재거리는 다정한 소리들이 마치 시가 되어 감쪽같이 눈앞에 나타날 때가 있다. 세 분 시인이 걷는 시의 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건필을 바란다.
 
 
정훈 | 문학평론가.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문학사회에 나섰다. 평론집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과 시집 『새들반점』을 냄. bluejh3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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