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3호-추천사1】 낮은 자리에서 잡아낸 삶의 세부 - 손진은

장소시학 승인 2023.10.12 16:13 | 최종 수정 2023.10.14 13:21 의견 0

추천사

 

낮은 자리에서 잡아낸 삶의 세부

손 진 은

 

김보성의 시는 말을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거나 가장하지 않고 삶을 어렵지 않게 구체적으로 그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시를 잘 모르겠다는 소리가 들리고 어려운 시들이 어려운 대로 방치되면서 시가 독자와 유리되어 시달림을 받는 현 상황에서 독자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않는 이런 시들도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그의 시 중 역사적 현실과 가난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관용하는 인간들을 다룬 시편들에 눈길이 많이 갔다. 분명 잘난 인간들이 아님에도 그들의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볼 시편들은 「곰보배추」와 「하루꼬」, 「혼인날」같은 작품이다. 「곰보 배추」는 ‘호야 오빠’를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흠 있는 남자를 만나 시집 간 곰보에다 다리를 저는 처녀 이야기를 다룬 시편이다. “버선발 잘솜잘솜 콩을 심었”다거나 “명치끝이 아파 친정 가지 않았다” 같은 표현, 무엇보다 깎고 문지르기 삼 년/옴박옴박 함지박 애기 들어 보실래요“같은 민중생활사와 말법이 진득이 묻은 개성적인 언어 구사와 현장성, 시 형식에 대한 배려에서 그의 특장이 한껏 나타난다. 「하루꼬」는 해방 전 “왜인 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아낙의 구술을 기반으로 쓰였다. 하루꼬라는 여자는 “두부자루에 비지 나오듯” 비좁은 신작로에 넘치는 해방 구호에도 “어설픈 쪽 짓고” 고방 열쇠를 쥔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자기 나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서서히 한국 사람이 되어간 인물을 보듬는 시인의 눈매가 참 따스하다. 여백도 있고, 사투리로 된 속담 구사도 제법 자리를 잡은 작품이다. 「혼인날」은 “논 몇 마지기”를 위해 ‘땅딸보’에게 시집을 보낸 처녀 이야기를 다룬다. “새색시, 상 밑에”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지만, 남자 구실은 하는 사위를 보고 장모는 기뻐하고, 시어머니는 “일꾼 들어왔다 싶은지” 신이 난다. 그 상황은 시의 결구에서 “앞을 보니 앞산이/뒤를 보니 뒷산이 불룩하다”의 생명성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아픈 가족사를 다룬 「설마」는 아프고, 지금은 남편이 된 검은 얼굴의 사내 이야기 시편인 「먹구랭이」는 해학과 유머가 잘 드러난다.

그의 시가 이런 인간만을 다루는 건 아니다. 질곡의 우리 역사와 가족사를 뚫고 온 쓸쓸하고 안쓰러운 사람들을 감싸 안은 시편들 다음으로 김보성은 욕망에 취한 당대 남녀들을 다룬 시편들도 다수 보여준다. 애정과 성은 한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일 같지만,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을 반영하는 척도가 된다. 김보성의 시에서 남녀들은 쉽게 성적인 상대자가 된다. 이는 가정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 가정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남녀는 그런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시편은 많지 않다. 택시 기사 남편과 도박으로 이혼하고 수십 명의 남자와 만나 돈을 뜯겨가면서 아직도 “청춘사업”을 하는 “오십 후반”의 여자(「난희」), 건축 일하는 남편 몰래 모텔에 나가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모텔주인과 바람을 피우며 돈을 버는 아낙(「로켓 모텔」), 만날 때마다 구강 성교를 요구하는 여성에 시달리는 노인(「게이트볼장」), 비오는 날 성관계로 인해 세면바리에 걸려 부끄러워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자책을 하는 사내(「에프 킬러」)도 있다, 심지어 “침대 양쪽으로 묶인 손”을 풀어놓으니, 그 손으로 자위행위를 하는 어머니(「아들」), “며칠 동안 못 보는데 숙제나 하고 가”자며 성 행위를 하는 부부, 승려와의 일탈(「횡재」), 이로 인해 미숙아를 낳은 이혼녀(「공양」)까지 있다. 시인은 어떻게 이렇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을 채집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욕망을 다룬 김보성의 시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인간 욕망의 집합소 같다. 김보성은 본능과 욕망으로 육체에 탐닉하는 인간, 속고 속이는 약삭빠른 인간 등 온 세상에 깔린 음습하고도 은밀한 인간들의 양태를 통해 갈 데까지 가버린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을 파헤치려 하고 있는 듯하다.

글쓴이는 김보성의 작품에서 역사와 가난의 질곡을 이겨내는 민중의 생활사를 다룬 작품들에 그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부분들을 더 깊이 파고들어 자신만의 개성을 확고히 다져나가기를 바란다.

 

손진은 시인

◇ 손진은

시인·문학평론가, 경북대 문학박사.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학사회 나옴. 경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쳐 대구교대 대학원 외래 교수.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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