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3호-신작시】 말이산 외 9편 - 최영순

장소시학 승인 2023.10.23 14:44 | 최종 수정 2023.10.26 11:47 의견 0

신작시

말이산

                             최 영 순

 

이슬 아침 머금고 
생글거리는 광대나물꽃 지천인데
제각각 몸집 자랑하는
아라가야 왕과 귀족의 고분

살구나무 홀로 우뚝 
한때는 시온중학교로 번성했던 운동장
치마 짧고 머리 길다며 
단속하던 규율 부장 같고

1호분 옆에서는 
아장거리며 머리 기틀이 
쪼뼛 솟아 멋스런 후투티 
영이 닮았다

나 말이야
다리 아픈 남동생 업고 기차줄 학생 바라보며  
동생 엉덩이에 피가 나도록 꼬집었지만
마음은 풀리지 않았어

검정고시로
중 
고등 
늦깎이 대학졸업에  
신협 이사가 되었다는 영이.

 

혼저옵서예

섬 속의 키 낮은 섬
돌담길 꼬닥꼬닥 걸으니
노랑 유채꽃이 
여기까지만 

햇살 좋은 사월
양 팔 벌려 춤추는 이삭들 
나까지 노릇해 지는데
더는 다가오지 마세요
보리보리

전봇대 없는 가파도가 빙긋거리며
힘들 땐 쉬어가도 괜찮아 괜찮다.

 

무화과

봄부터 여름 걸쳐 후한 인심에  
먼저 찍는 쪽이 임자
위쪽은 직박구리 손닿는 곳은 내가 
농가 먹는데

옆집 블루베리 처자가 궁금한지 
목 길게 빼고 담장 넘어가니
가지나 잎사귀 하나에도
꾀나 골치 아픈 주인
무화과나무 허리를 댕강 잘랐다

자세 낮추고 등 굽은 나무
따서 뚝 먹으려는데
단내 맡은 개미 잔치 잔치 북적인다
먼저 찍었으니 다 먹어라
그늘에 숨어.

 

물불

드루와 
드루와 
따라 따라 
주거니 받거니 
오늘 먹을 일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원래
맨날 매일  
금방 지금도 
많이 술술 땡기고 
모든 반찬은 안주 니 때매 한 잔
 
내가 자식을 못 낳았나
살림을 못 살았나
마실수록 혀 짧아지고 속 꼬이는지
끊임없이 까탈 부린다.

 

복코

동안이고 법 없이도 살 양반
요일별 팬티도 선물해 주고
홍콩 보내준다며 안아 주었는데

여시한테 홀려서 놔 주라 사정하니
아파트 받고 퇴직금 정리했다

여자와 합쳤다더니 노숙자
상거지 되니 울면서 불쌍해 죽겠다는 딸
결혼 앞두고 
아버지 손잡고 들어가는 게 소원이라며

엄마 받아 주면 안되겠나
시집가고 나면 혼자 사는 것보다

나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쓸 만할 때 가서 다 늙어.

 

왕보리수

살 때 덤
뜰 귀퉁이 자리 내어주니
주저리주저리 빨알간 보리똥
따다가 먹다가

누구는 깨달음 얻었다는 보리수 밑
서로의 그늘이 되지 못하고
가슴에 못 박고 흉터 냈다

실타래 풀 듯 풀어가며 산다지만
당연한 것이 사라지고
자신에게 걸림돌 되면
버리거나 포기 한다는데

나를 시들게 하는 사랑
제대로 곪은 상처 터질 듯해도
헤어질 엄두가 나지 않아

만신창이 내외 사랑.

 

셀프 백 세

요양원
어르신 고생 많으셨지요
이제는 즐거움 누리세요 

젊었을 적
성미가 괴팍해서 잦은 말싸움에
까슬까슬 시샘도 남달라
아들 내외 살림나기 전까지 한 방에서 자고

국수에 넣어 끓이는 라면 하나에도 
호사스런 음식이라며 
독하게 나무라던 영산띠기
준비 없는 노후가 빨리 찾아왔다

정신이 초롱초롱 백 세
딸 아들 주변 발길 뚝 끊어졌는데

시집살이 며느리 
양손 가득 문턱 넘는다
부모님인데 우짭니꺼.

 

황사늪

메기 하품만 해도 
물이 넘치던 법수 황사리
공장부지 될 거라며
굴착기가 구릉 논과 늪을 덮을 때

조상 대대로 우리 집이라며
붕어 가물치 미꾸라지는 가슴 치며 거품 물고
여치 메뚜기 방아깨비도 한길까지 나와 
방방 억울하다며 울고불고

어스름 녘
무덤자리 바라보는 적막함이 
멍 때리는데

장작불 타닥타닥 
폐계 백숙 끓이는 연기의 쓸쓸함을 
길섶 팽나무는 알고 있을까.

 

숲속

암컷 꼬드긴다고
앞산에서 버버꾹 부른다
빗비비 조잘조잘 사랑하더니

남의 둥지 알 하나 
영양보충하고 
빈자리에 깜짝할 새 낳고 도망

가슴으로 낳은 개개비는 
숨 가쁘게 먹이 넣어주는데
큰 입 벌리고 아우성치는 뻐꾸기 새끼
발밑을 더듬적거리다
새끼 개개비를 허공에 밀쳤다

악랄 
잔인해도
밤낮으로 보살핀다 

무더운 여름 쑥쑥 자라 포드득 날개 짓
가까이서 지켜보던 낳은 정 어미
대견하다 잘 컸다
따라 온나
벅꾹 벅꾹. 

 

악양루

함안강과 남강이 어울더울 
올려다 뵈는 낭떠러지 정자

군인 간 뱃사공 오라버니 대신
부모님 모시며
두 여동생이 노 저었다는 나룻터  
 
모터엔진 나룻배 햇살에 졸다 
카페 주인 기다리는 오후

겨울이 곱다는 
산허리 고블고블 처녀뱃사공 노을길
건너 모래톱 위에
육 년 동안 찾은 기억도 없는 보물과
중앙초등 시절 소풍이 펼쳐진다.

 

최영순 시인

◇ 최영순

| 시인. 함안 태생. 공동시집 『양파집』(2020)과 『문학고을』 신인작품상(2021)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라 홍연』(2022)을 냄.
ms2924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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