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7-조해훈 시인의 지리산에서 띄우는 편지①】 초여름 지리산 화개골에서 보내는 나날들

시민시대1 승인 2022.07.08 13:07 | 최종 수정 2022.07.11 09:54 의견 0

오늘 아침 5시 조금 못 되어 일어났습니다. 어제 커피를 두 잔 마시고, 차茶도 밤늦게까지 마셨는데도 말입니다. ‘얼굴에 물도 바르지 않고’(?) 마당으로 나가 스틱을 짚고 천천히 길을 나섰습니다. 이미 사방이 훤했습니다. 맥전麥田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맞은 편 황장산[黃獐山․942.1m]에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아 신령스러운 한 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렸습니다. 만곡萬谷 김용상[金容相․79] 선생님께서 기거하시던 미리내농원 앞을 지나니, 길가에 매실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주민들을 위해 재능기부 차원에서 운영하는 목압서사木鴨書舍에서 만곡 선생님은 한시와 한문, 인문학을 공부하시다 몸이 좋지 않아 지금은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 계십니다. 부친 때부터 광주 금남로에서 ‘무등산추어탕’ 식당을 오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화개동천花開洞川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길 왼쪽에 ‘목압마을 공동묘지’ 표지판이 비스듬히 서 있었습니다. 차茶 생산업체인 ‘조태연가’를 지나는데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습니다. 더 길을 따르다 왼쪽 계곡 방향인 ‘방갈로민박’ 표지판을 보고 내려갔습니다. 방갈로민박은 제가 사는 운수리雲水里 목압木鴨 마을의 최동환[61] 이장님이 계곡 가에 운영하시는 곳입니다.

이 민박집으로 가는 길이 왼쪽으로 90도로 꺾어지는 지점에서 직진을 하면 차밭과 매실나무 밭 사이로 연결되는 비포장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자그마한 아치형 계곡 다리가 나타납니다. 왼쪽에 계곡을 끼고 걸었습니다. 계곡 건너 아직 잠이 깨지 않은 모암牟庵마을이 산비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목압다리 건너기 전 도로가에서 바라본 필자의 마을.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사진=조해훈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목압다리 건너기 전 도로가에서 바라본 목압마을.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사진 = 조해훈]

곧 이어 화랑수花浪水마을로 접어들었습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에 나있는 화개동천 계곡 다리[화랑교]를 건넜습니다. 여기서부터 걸어왔던 반대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가 뭣해 다리를 건너 도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구경하며 느릿하게 걷다보니 모암 마을과 계원鷄原마을을 지나 필자가 사는 목압 마을 버스정류소까지 왔습니다. 요즘 목압다리[목압교]를 새로 놓는다고 한창 공사 중입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공사를 시작하지 않아 포클레인 등 장비는 멈춰 있었습니다. 기존 다리를 뜯고 임시로 놓은 철골조 다리를 건너니 용운민박 할머니께서 집 앞에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보고 “어디 갔다오요?”라며 물으셨습니다. 저는 “예. 산책 좀 하고 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위쪽 삼거리민박 할머니께서도 마당에 풀을 뽑고 계셨습니다. 마을 할머니들은 너무 부지런하십니다. 언제 주무시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집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아침 6시 반가량 되었습니다.

본채 서재에서 중국 서진의 진수[陳壽․233∼297]가 지은 『삼국지』 중 ‘촉서’蜀書를 들고 아래채로 가 포터에 전기를 올리고 찻상에 앉았습니다.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 이야기]을 펴 소리 내 읽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목소리를 틔우려는 의도도 있지만, 하루 종일 쓸 머리를 예열(?)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러한 용도로 읽는 책은 『논어』 등 사서삼경이 주를 이룹니다. 한시를 읽을 때도 있습니다.

어제 부산에서 부산고교 교장 등을 역임하신 조갑룡[71] 선생님께서 서사에 오시어 함께 마시던 발효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 천천히 마셨습니다. 속을 워밍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0분가량 관우와 조조, 유비 등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는 내용을 읽다 외출할 준비를 해 오전 7시30분 화랑수 마을 위쪽 신흥神興마을에서 출발하는 구례행 농어촌버스를 타러 정류소로 나갔습니다. 10분가량 기다리다 버스를 타고 가 화개 다운타운에 있는 화개공용터미널에 내렸습니다. 할머니들도 몇 분 버스에서 내리시더군요. 터미널 앞 보덕의원이 문을 열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할머니들이 미리 의원에서 기다리시려는 겁니다. 집에 혼자 계시는 것보다는 의원에서 여러 마을의 할머니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기 때문일 겁니다.

화개골짜기에 사시는 할머니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외향적(?)이신지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걸 즐기십니다. 버스 안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화개까지 내려오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 시간이지만 할머니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시느라 왁자지껄합니다. 화개골 사람들은 모두 목소리가 큽니다.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골짝이다 보니 억양도 강한 편입니다. 어느 분이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목소리가 큰 이유는 계곡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필자도 화개골짝에서 살다보니 목소리가 커질 뿐더러 억양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낍니다.

터미널에서 제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글을 쓰는 ‘쉼표하나 카페’에 가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카페 옆 ‘김영이 미용실’의 김영이[63] 사장이 “들어와 잠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카페 김순이[66] 사장님의 동생으로, 필자와 동갑이어서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 앞쪽인 모암 마을에서 ‘붓당골차 다원’을 운영하는 김종열[59] 사장이 이 자매의 남동생입니다. 미용실 안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머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하동에서 발행되는 신문 두 세 가지를 읽다 바깥으로 나오니 카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필자가 첫손님이었습니다. 창가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셨습니다. 맞은편 동원마트의 아주머니께서 일 하시느라 마트 안과 입구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카페에 들어와 커피를 마시기까지의 일을 주절주절 적어봤습니다. 『시민시대』에 연재할 첫 원고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가의 포맷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하니 대략 한 달간의 일상을 글로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매달 한 번씩 원고를 써 보내야하기 때문이지요.

차 만들기 중인 필자

지난 한 달간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한 부분은 ‘찻잎 따기’와 ‘차 만들기’[製茶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20일 곡우穀雨 무렵부터 찻잎을 조금씩 땄습니다. 차밭이 마을 뒤의 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아래쪽인 섬진강변 덕은리德恩里의 여러 마을들 차밭보다 찻잎이 늦게 올라옵니다. 낮에 차산에서 찻잎을 따 해질녘에 집으로 내려오면 바로 찻잎을 솥에 넣어 덖거나 저녁을 먹고 덖기도 했습니다. 그날 딴 찻잎은 당일 바로 덖어야 합니다. 아무리 찻잎의 양이 적더라도 마찬가지이며, 차를 만드는 과정은 찻잎의 양과는 관계없이 같은 방법입니다. 낮엔 찻잎을 따고 새벽까지 차를 덖느라 잠이 부족해 어질어질했습니다. 손으로 덖고 비비다 보니 차를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난해 2월에 제가 아래채인 연빙재淵氷齋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 불을 냈습니다. 회오리바람이 불어 아궁이의 불씨가 밖으로 튀어나온 때문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녹차 작업장’인 창고가 불에 타 차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3월 2~4일 다시 화로를 만들어 차솥을 걸었습니다. 혹여 다른 사람들이 차를 덖고 싶은데 차솥이 없어 애를 먹을 경우를 생각하여 차솥을 두 개 걸었습니다.

올해는 차를 많이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찻잎을 따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요. 차를 덖을 때 허리가 아파 애를 먹지만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라 억지로라도 견뎠습니다. 그렇지만 제 혼자 찻잎을 따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여러 사람들이 와 함께 찻잎을 따 덖었습니다. 그렇게 녹차와 발효차를 좀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제다공장이나 일반 다원처럼 양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엊그제 열흘가량 걸려 발효차를 완성하여 올해 차 만들기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든 차를 목압서사木鴨書舍를 방문하는 손님들과 함께 마십니다. 서사에는 경향각지에서 다양한 분들이 찾아오십니다. 서사 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입구에 있는 ‘목압서사’ 글을 보고 들어오십니다. 제가 서사에 있는 한 그 분들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차를 한 잔 대접해 드리고, 그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부분에 대해 성의껏 설명을 해드립니다.

여전히 매주 한 차례 갖고 있는 ‘조해훈 박사의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차례씩 개최하는 ‘목압서사 외부 초청 인문학특강’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한국해양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백태현 박사께서 「영화 속 지리산」을 주제로 특강을 했습니다. 이 달에는 서각가인 이완용 선생께서, 다음 달인 7월에는 불교민속학자이자 조선일보 칼럼리스트인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께서 특강을 할 예정입니다. 분기별로 주제를 정해 전시회를 갖던 목압고서박물관과 목압문학박물관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차 마시며 글 읽는 풍경

엊그제는 울산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이기철[65] 시인이 방문해 목압서사에서 하루 묵었습니다. 이튿날 그를 따라 화개면사무소 뒤쪽 잔디밭에서 이루어지는 한 행사에 구경꾼으로 참석했습니다. ‘지리산문화예술학교’의 행사였습니다. 화첩기행반 꽃차소믈리에반 풍류반 문예창작반 등 13개의 강좌반이 한자리에 모여 각 반별로 현장에서 수업을 하고, 화합도 다지면서 운동회도 갖는 자리였습니다. 이 학교의 행사에 제가 참석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학교에 대해 몇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0여 년 전에 악양에 사는 박남준[66] 시인과 섬진강 건너편 광양 다압에 사는 이원규[61] 시인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늘 만나 술만 먹지 말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취지로, ‘지리산행복학교’를 만들어 몇 개의 강좌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지리산행복학교가 지리산문화예술학교와 ‘지리산학교’로 분화되어 각각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지는 못했지만 지리산학교는 10주년 기념 책자를 발행했다고 하더군요. 지리산문화예술학교도 책자 발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리산학교에 대해서는 접촉을 할 기회가 없었고 아는 바가 없어, 이날 참석한 지리산문화예술학교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보겠습니다. 지리산학교에 대해서도 언젠가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기철 시인과 함께 행사 장소에 가 화첩기행반 천막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시인은 워낙 사교성이 뛰어나고 발이 넓어 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화첩기행반의 교사인 동양화가 몽피夢彼 김경학 선생과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지만 “전남 나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즉석에서 부채에 그림을 그려 이기철 시인과 저에게 하나씩 선물했습니다. 저는 “저는 드릴 게 차茶 밖에 없습니다. 댁으로 조금 보내드리겠습니다.”라며, 감사히 부채를 받았습니다.

지리산문화예술학교의 수업은 각 반별로 이뤄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한다.”고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수업을 하는 특정 교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 반의 교사와 학생들이 의논하여 수업을 하는 그 장소가 교실이라고 했습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교사가 학생이 되고, 학생이 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문예창작반 교사인 이원규 시인과 꽃차소믈리에반 교사인 민종옥[58] 선생이 소리북을 치면서 판소리를 가르치는 풍류반[교사 서은영]에서 학생으로 수업을 받는 형식입니다. 각반의 학생 수는 교사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10여 명에서 30명 선이라고 하더군요. 더 특이한 점은 ‘누구의 눈치나 간섭을 받지 않고 수업을 진행해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대안학교(?)적 문화예술학교라고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도 구심점 또는 컨트롤타워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여쭤보았다. 그러자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한 신희지 선생”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날 행사장 중간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진행을 돕던 여성분이었습니다.

제가 지리산에 들어와 살면서 외지에서 방문하시는 분들뿐 아니라, 지리산 구석구석에 살면서 속칭 ‘도사(道士)’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지리산에 사시는 분들은 너나없이 ‘고수’高手라고 생각합니다. 농사를 짓고 사시는 원주민들이나 각 골짜기에 들어와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생활을 하시는 분들 모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타고난 것인지 각각 나름의 기(氣)를 갖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키는 크지만 태생적으로 소심하고 여려, 그런 쪽에 속하지 못합니다. 지리산의 기운이 아직 제게는 없기 때문일 겁니다.

조해훈 시인

◇조해훈 시인 : ▷1987년 『오늘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국제신문 문화전문기자 역임 ▷현 목압서사 원장, 화개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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