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95) 골동서화에 일생 바친 명문가 출신 김광수

현감, 군수 지내다 벼슬 관심 없어 그만 둠
고서화·진기(珍器)·기서(奇書) 등 수집 빠져
자찬묘지명 친구인 이광사에 써 즐 것 부탁

조해훈 기자 승인 2022.07.29 16:38 | 최종 수정 2022.08.02 09:25 의견 0

“화려한 문벌에서 태어나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허황되고 괴상한 것을 추구하며, 기괴한 것을 좋아함이 고질병이 되어, 옛 그릇·서화·붓·벼루·먹 등등을 배우지 않아도 훤히 알아 진위를 구별하는 데 털끝만큼의 착오가 없네. 가난하여 혹 연기가 끊어지고 네 벽이 비어도 금석문과 서적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지며 기이한 물건에 손에 닿기만 하면 주머니를 터니, 벗들은 등 돌리며 손가락질하고 부모와 식구들은 꾸짖네.”

위 문장은 명문 문벌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9~1770)의 자찬 묘지명이다. 판서를 지낸 김동필(金東弼·1678∼1737)의 아들로, 1729년(영조5)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를 포기했다. 고서화·진기(珍器)·기서(奇書) 등의 수집에 빠져 살았으며, 이들 골동에 대한 감식안도 일가를 이루었다.

김광수 자신이 지은 묘지명.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김광수 자신이 지은 묘지명.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김광수의 이 묘지명을 두고 흔히 그의 호를 붙여 ‘상고자 생광지(生壙誌)’라고 불렀다. 그는 묘지명을 자신과 친했던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게 부탁해 글씨를 쓰게 했다.

김광수의 가문에 대해 잠시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5대조는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다 남해 등지로 유배됐던 대사헌 김덕함(金德諴·1562~1636), 고조부는 홍문관수찬을 지낸 김설(金卨·1595∼1668), 증조부는 형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낸 김우석(金禹錫1625∼1691), 조부는 세도가 홍주국의 사위가 되어 가문의 기반을 다진 김유(金濡·1652~1693)이다. 부친 김동필은 이조판서·의금부지사·춘추관 동지사·오위도총부 도총관·세자좌빈객·한성판윤 등을 역임하며 가문의 명망을 날린 인물이다. 모친은 임원군(林原君) 이표(李杓)의 딸이다. 김광수 자신은 예안현감·양근군수를 지낸 바 있지만,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된 관심은 오로지 골동서화 수집과 여행에 있었다.

그가 친구이자 묘지명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한 이광사 역시 대단한 문벌가 집안 출신이지만 과거를 하지 않고 강화도에 들어가 살았다. 이광사는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 일파가 일으킨 ‘을해옥사’(또는 ‘윤지의 난’)에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전남 신지도로 이배되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광수의 시문.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광수의 시문.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면 김광수는 왜 미리 묘지명을 지었을까? 조선시대에 자찬묘지명을 지은 문사는 여럿 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이 회갑 때 지은 자찬묘지명이 잘 알려져 있다.

김광수는 이광사와 더불어 서화고동(書畵古董) 및 한묵(翰墨)으로 교제하던 공간을 내도재(來道齋)로 불렀다. 이것은 중국 명나라의 뛰어난 학자였던 왕세정(1526~1590)의 내옥루(來玉樓),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화가 겸 서예가인 동기창(1555~1636) 내중루(來仲樓)의 의미를 본 딴 것이다.

또한 왕세정이 살아있을 때 전(傳)을 지어 받는 풍조를 유행시킨 적이 있다. 김광수는 이를 좇아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이덕수(李德壽·1673~1744)에게 부탁해 「상고당김씨전(尙古堂金氏傳)」을 짓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묘지명을 지었다. 이러한 예들은 김광수가 명나라 문인문화의 경향을 그대로 본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광수가 예안현감 당시인 1745년에 중수한 예안향교.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광수가 예안현감 당시인 1745년에 중수한 예안향교.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고당김씨전』과 신유한(1681~1752))이 쓴 『상고당자서후제(尙古堂自敍後題)』에 따르면 “집안에 모은 고서화와 진기는 모두 천하명품이며, 고시문(古詩文) 등도 천하의 기서인데 뜻에 맞는 것이 있으면 가재를 기울여 비싼 값으로 구입하였다”라고 했으며, “감식은 신묘했다”라고 했다.

김광수는 중국 남종문인화의 개념과 계보를 상세히 알고 있었고, 좋아했다. 그는 금석물(金石物)의 수집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김광수는 중국인 임본유와 그 아들 임개와 교제하면서 한나라와 위나라의 비문을 수집하는 한편,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를 탁본하여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또한 이덕수·신유한·이광사 외에 이병연·이하곤 등은 물론 정선·조영석·심사정·이인상·강세황 등 화가들과도 교유했다.

그리하여 김광수는 중국의 회화도 다수 소장했다. 심주의 「막쇄동작연가도(莫碎銅雀硯歌圖)」, 구영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유령의 「팔준도(八駿圖)」 등이 그것이다. 그가 소장한 이러한 중국의 회화들의 영향을 받아 이인상의 「이인물도(二人物圖)」, 심사정의 「강남춘도」, 이광사의 「고승완회도(高僧玩繪圖)」·「층장비폭도(層嶂飛瀑圖)」 등이 탄생했다.

여하튼 김광수는 세상의 험난함과 관직의 화려함이 싫다며 벼슬을 버리고 예술에 심취하여 일생을 산 문화예술인이었다. 그는 「화조도」와 「초충도」 등의 그림은 물론, 금석탁본을 모은 『상고서첩(尙古書帖)』 등을 남겼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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