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생동하는 자연에 뿌리를 둔 과학철학을 개척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생동하는 자연에 뿌리를 둔 과학철학을 개척하다

조송현 승인 2017.01.24 00:00 | 최종 수정 2018.07.11 20:56 의견 0

고향인 그리스 아토스 반도의 스타이기라 마을에 세워진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출처: 이동희의 철학여행카페(16) cafe.daum.net/chung-sane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는 플라톤과 함께 서구의 철학과 과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플라톤이 운영한 아카데미아에서 20년간 공부하면서 ‘아카데미아의 예지’라거나 ‘플라톤의 경이로운 제자’라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인류 지성사를 통틀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위대한 두 철학자가 동시대에 스승과 제자로 활약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자신이 직접 리케이온(lykeion)이란 학원을 세워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고 장대한 철학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철학과 논리학과 자연학은 특히 중세 후기(13세기 이후)의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아한 문체 '황금의 강' 칭송

아리스토텔레스는 트라키아의 북동 해변의 마케도니아 스타기라(stagira)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의 주치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생물학과 과학 일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7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입문해 20년을 보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의 사상과 인품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아카데미아 시절 플라톤의 방식대로 많은 『대화편』을 저술했는데, 동료들은 저작의 우아한 문체를 ‘황금의 강’이라며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 플라톤의 핵심 이론인 형상론을 재차 긍정했지만 얼마 뒤 그 이론을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상적으로 플라톤과 언제 결별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에 있는 동안 사상적으로 성장과 변화의 과정 속에 있었던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이 아카데미아에 함께 있을 때조차 학문적 기질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수학보다 경험적인 자료들에 더 많은 관심과 열의를 가졌습니다. 그는 세월이 갈수록 자연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에 더욱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 생동하는 자연 속에 뿌리박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동하는 자연에 뿌리를 둔 과학철학 개척

반면에 플라톤은 사유의 세계를 변화하는 사물의 세계와 분리시키고 이데아에 참된 실재를 부여했지요. 플라톤은 참된 실재는 본래 사물과 분리된 채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초시간적 존재의 정적인 영역에 밀착되어 있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동적인 영역에 천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통박하지 않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인 플라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구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후기 주요 저작들에까지 플라톤의 영향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의 명백한 ‘플라톤주의적인’ 시기는 플라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카데미아 경영은 플라톤의 조카인 스페우시포스(Speusippos)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새로운 분위기가 맞지 않아 아카데미아에서 물러나 아테네를 떠났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헤르메이아스 왕의 초빙으로 트로이 근처에 있는 아소스에 간 것은 기원전 347년께였습니다. 당시 아소스의 지배자인 헤르메이아스도 한때는 아카데미아의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얼마 동안 철인 군주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궁정 안에서 소규모 사상가 집단을 형성했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3년 동안 저술하고 가르치며 계속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궁정에서 기거하는 동안 헤르메이아의 질녀이자 양녀인 피티아스(Phythias)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아테네에 정착해 활동할 때 피티아스가 죽자 헤르필리스(Herphyllis)라는 여인과 결합했습니다. 그녀와 오래도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편찬했던 니코마코스(Nicomachos)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에서 3년을 보낸 후 인접한 레스보스 섬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해양생물학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통일론자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통일국가가 분산된 도시국가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편 것입니다.

니코마코스의 아버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42년 무렵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의 알렉산드로스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장래 통치자의 스승으로서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필립포스가 죽은 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계승하자 스승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임무도 끝난 셈이죠. 그는 고향 스타기라에 잠시 머물렀다가 기원전 334년 다시 아테네로 돌아갔습니다.

이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중 가장 생산적인 시기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정치가인 안티파트로스의 지원 아래 학원을 세웠습니다. 학원은 소크라테스가 사색하러 가곤 했다고 전해지는 아폴론 신전 부근에 있는 리케이온 숲 속에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제자들은 숲 속의 산책로 페리파토스를 거닐면서 철학을 토론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라고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산책과 토론 이외에 강론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2년 동안 리케이온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논리학, 철학, 과학의 주요 분야가 망라됐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보편적 지식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기원전 323년) 직후부터 일어난 반마케도니아 정서에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마케도니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크라테스처럼 ‘불경죄’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대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는 말을 남기고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Chalcis)로 피신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그는 기원전 322년 오랜 지병이었던 위장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도 서구 철학을 지배했으며,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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