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1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26)

이득수 승인 2024.03.28 00:00 의견 0

“뭐 이제 와서 새삼 열찬씨 원망할 것은 아니지만 나이 든 여자가 혼자 관광을 하면 무슨 사연이 있는 여자, 최소한 남편이 죽고 자식과도 소원한 그런 여자로 보일 것 아냐?”

“그렇구나.”

흘낏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넘었다.

“옥자씨, 여섯 시에 약속이 있는데 일 보고 내가 나중에 전화할 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산우회사무실에 가서 친구들과 훌라를 치기로 한 것이었다.

14. 송도와 진주여자(26)

“아이구, 드디어 선수가 하나 왔네. 어서 이리 앉아.”

사무실문을 열자 입구 쪽의 사각테이블에서 화투 패를 때던 두 남자 이정복씨와 김봉룡씨가 반색을 했다. 조기축구회동료에서 한 동안 부지런히 등산을 다녔던 5잡의 큰 형님인 김봉룡씨와 맞은편에 앉은 부산대출신으로 이전무로 불리는 이정복씨는 산우회에서 고집불통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자기고집이 세기보다는 무슨 일이 자기 뜻이 아닌 남의 뜻대로 무엇이 되는 것이 못 견디게 싫고 더더욱 다른 사람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어쩐지 불쾌한, 참으로 묘한 사람들이었다.

자기 나름대로의 룰을 절대로 양보를 않아 고스톱에서도 아직 두꺼비를 쓰지 않는다든지, 손의 화투 패 두 장으로 바닥의 두 장을 치는 <중폭>이 없다든지 설사를 하면 남들이 피 한 장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도무지 일반적으로 통용이 되지 않는 룰을 고집해 아무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아 화장지 박사장이 오지 않는 날이면 도무지 3명의 멤버가 구성되지 않는 것이었다.

“잘 됐네. 가국장은 거게 형님들하고 좀 놀아주소.”

안쪽의 원탁에서 훌라를 치던 양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영진, 황도현, 어릴 때부터 같이 현장을 띤 평생동지이자 적수인 두 미장공과 페인트 상 설영수씨, 유리집 윤사장의 다섯이 패를 벌이고 있었지만 재미가 없다고 성원미달이 된 고스톱 판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놀다 여덟 시 가까이 되면

“자, 지금부터 먹기 다섯 판!”

산우회의 지도자이자 살림꾼격인 양경석 사장의 신호로 다섯 판을 세어서 마치고 두 쪽에서 뗀 개평을 모아 가장 돈을 만이 딴 사람에게 쥐여 주면

“어이, 돈 따서 자진납부할 사람 없나?”

하면 돈을 딴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더 내놓아 그 돈으로 식당에 가서 술밥을 넉넉히 시키면

“장원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팀별로 제일 많이 잃은 사람이 술잔을 올리는 것이 룰이었다.
“고맙네. 자네도 열심히 해서 내일은 꼭 장원을 하시게.”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술밥을 넉넉히 먹고 아홉시 경에 식당을 나오면

“어이, 훌라조 너거는 2차 붙을 거제?”

하고 고스톱조가 빠지면

“그래 지금부터 인정사정 안 봐 준다!”

“그래. 오랜만에 우리 국장님 국고구경 좀 하자!”

이 사장 황사장이 눈을 부릅뜨면

“무조건 열시 반 까지다!”

양경석씨의 이야기를 신호로 열찬씨와 다른 사람들도 판에 끼어들었다. 저녁 먹기 전보다 판을 크게 키워 데라를 듬뿍 뗀 페인트 설영수씨가

“자, 끗발주 한잔씩 하시고!”

소주, 맥주, 드링크와 마른 오징어. 줄줄이 비엔나 같은 안주를 테이블에 늘어놓고 술 한 잔씩을 권하고는

“자, 나는 갑니다.”

데라통의 만원짜리 서너 장을 빼어들고 나가면

“아이구, 저 찐드기!”

일행들이 혀를 찼다. 매번 돈만 원 남짓 사다주고 3,4만원씩을 챙겨가는 것을 남들이 다 알건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열시반이 되면

“나는 간다!”

양경석 사장이 칼 같이 일어서면 물론 돈 욕심도 없는 건 아니지만 이미 도박중독에 걸린 두 미장사장이

“어이, 국장님!”

“어이, 윤 사장!”

멤버가 마저 빠져나가 판이 깨어질까 봐 못 가게 손을 잡는데

“나도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네.”

열찬씨도 자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토곡 홈마트 앞에 내려 술과 안주를 사고 어제 갔던 시누대 밭에서

“옥자씨 자나?”

전화를 거니

“으응. 여태 전화 기다리다가 방금 전에 깜빡.”

하더니

“잠깐. 옆방에 은석이 자는가 보고 올께.”

“왜?”

“그 아이가 사춘기가 되서 예민해. 요새 고모가 다른데 신경 쓰느라 자기를 안 돌본다고 입이 튀어나오는 것 있지.”

“그래?”

“세상에! 오늘 아침 등교하면서 가열찬이가 누구냐고 묻는 거야. 고모 남자친구 생겼나, 그러면 자기는 버리고 그 남자한테 가느냐고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으응?”

“내 전화기를 몰래 열어본 모양이야. 우리 조심해야 돼.”

“허허...”

“그러고 보니 내가 당장 가방이라도 하나 꾸려 당신 사는 부산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다 들었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아무 대책도 없이.”

“당신이 언제 대책 세워놓고 날 밀어붙였나? 그냥 성추행범, 아니 성폭행범이지.”

“...”

“그렇지만 내 잘못도 있고 열찬씨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해.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 둘이 어떻게든 정붙이고 살려고 노력한 점도 있고.”

“...”

“그렇게 당신을 원망하면서도 젊을 때는 가끔 당신과 잠을 자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깬 적이 더러 있었지. 그러면서도 그게 이상한 게 그렇게 밉던 당신이 어느 듯 그리운 거야. 바로 옆에 누워있는 것처럼 숨소리가 들리고 땀 냄새가 나고 또...”

“또?”

“등줄기가 후끈하면서 황홀한 느낌이 나면서 눈앞이 아뜩해지고.”

“미안해. 접촉한 남자가 나 밖에 없어서 그런가 봐.”

하는데 훌쩍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나는지라

“옥자씨, 우는 거야? 미안해.”

“나쁜 사람!”

또 한참 훌쩍이는 소리가 나더니

“걱정 마. 어제 밤에 다 용서해주기로 하고. 다시는 안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아침에 또 원망이 치밀면서 오후가 되면서 어느 새 당신 전화를 기다리는 나를 발견한 거야.”

“...”

“뭐 이따위 여자가 다 있느냐, 너는 밸도 없고 성질도 없고 분하지도 않느냐는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이 밉기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하긴 같이 잠잔 사람, 몸을 섞은 남자가 나밖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뭐? 몸을 섞은 사람?”

“참 그러네, 하고보니 나도 쑥스럽네.”
“하긴 당신만이 그런 사람이지. 나를 안아준 사람 내 몸 위에, 아니 내 몸속에 왔다간 유일한 사람.”

“미안해.”

“제발 그 미안해 소리하고 그렇구나, 소리 좀 그만해. 내가 뭐 이제 와서 뭘 책임지라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약간의 책임이나 속죄 그러니까 뭐 쉬운 말로 무릎을 꿇고 빌거나 얼마간의 돈을 변상한다거나 하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돈이야 옥자씨가 엄청난 부자라 내 잔돈푼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또 무릎을 꿇고 비는 것도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만나는 일이 서로 쉬운 일도 아니고.”

“됐어요. 지금 와서 책임은 무슨 책임. 그런데 요즘와선 신기하게도 남자하고 자는 꿈, 특히 당신하고 자는 꿈을 자주 꾸는 거야. 어떤 날은 그런 꿈에서 깬 흐릿하고 나른한 정신상태에서 문득 당신하고 한번 자봤으면 하는 생각이 다 드는 거야.”

“에이, 피차 다 늙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난 한 번 더 남자와 자고 한번쯤은 남자가 뭔지 진짜 진하게 한번 느껴보고 싶은 거야.”

“그래도 안 돼. 나는 이미 다 늙었어.”

“무슨 소리. 내가 간호사 아니야? 그런 기술적 문제는 아무걱정이 없어.”

“...”

“...”

한참이나 침묵이 흘러 열찬씨가 또 한 모금 병째로 맥주를 들이키다가 밍밍해서 요번엔 소주를 들이키는데

“지금 내가 무슨 소리 한 거야? 창피하게.”

“괜찮아. 우린 이미 살을 섞은 사이가 아니야? 부끄러운 생각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어.”

하고 또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

“추운데 당신 들어가. 홍여사가 잠 못 자고 기다릴 텐데.”

하고 일부러 하품을 하는 척 하는 소리가 들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당신 오늘밤 꿈에 진주로 올 거지.”

“...”

“아니야. 괜히 그랬어. 미안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또 맞다보면 어느 새 익숙해진다더니 평생을 사죄해도 못 씻을 것 같은 과오를 사죄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점점 무감각해져서 마치 아주 친숙한 연인이나 부부처럼

“오늘은 뭐 하고 시간 보냈는데?”

“뭐 책 좀 보다가 쉬다가 놀다가. 혼자 사는 여자가 특별한 일이 있을 것 있나?”

“하긴 그렇지. 그런데 책은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는 거야?”

“영어책. 가끔 복지센터에 강의를 나가야하니까 매일 조금씩이라도 보아야해.”

“그럼 실력이 엄청나단 말이네. 영어로 된 시나 소설, 학술서적원서도 읽는단 말이지?”

“소설은 무난하고 시는 상징성 높게 함축된 언어 또 원서는 전문용어 때문에 한참을 연구하거나 참고서적을 보아야해.”

“도대체 어느 세월에 그 어려운 공부를 그렇게 해 낸 거야?”

“마흔세 살 여름이었지. 이제 중매나 소개를 하겠다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몸도 조금씩 늙는 것 같아 왠지 더 허전하고 조바심이 나더군. 처음엔 늙어서 해외여행이라도 갈 것이라고 시작한 것이 어느 날 단지 영어 한 과목이라도 가열찬 그 인간보다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 그래서 정말 세월 가는 걸 잊고 죽고살기로 공부한 거지.”

“그렇지만 거기서 왜 또 내가 나와?”

“당신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아무리 해도 합격되지 못 한 예비고사에 대한 좌절, 공부에 대한 아쉬움도 컸나 봐. 뭐 그게 서로 매치된 거지.”

“그래. 학원에는 좀 다녔나?”

“아니 거의 독학으로.”

“저런 발음이나 대화가 제대로 되던가? 나는 지금 고1정도 수준으로 사전만 있으면 웬만한 영어책은 떠듬떠듬 읽고 해석을 하는데 발음이 도무지 안 돼. 오죽하면 일곱 살짜리 외손녀가 유치원에서 배어온 영어실력보다 못하다고 핀잔을 들을까? 애플이니 카니 하는 간단한 단어조차 발음이 안 된다고.”

“내가 옆에 있으면 가르쳐줄 텐데.”

이렇게 평온하게 대화를 하다가

“참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다시 전화가 오면 단단하게 따지려고 했는데. 이봐요, 가열찬씨 내가 지금 당신의 화술에 말려들었을 뿐이지 당신을 용서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정색을 하다가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이제 당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자꾸 옅어지면서 꼭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눈빛을 이상하게 만들어 옆구리를 찌르며 덮쳐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저런!”

“어떤 때는 당신과 밤을 새는 꿈을 꾸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 깨고. 이젠 어쩜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도 없을 것 같아.”

“그래? 내가 죽을죄를 지어 할 말은 없지만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아. 그래도 한 때 살을 섞고 사랑한 사이이니까?”

“살을 섞고?”

“그래. 죄송하지만 단 한 사람, 마음을 주고 곁을 준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평생 동안 열찬씨 당신 말고는 생각해본 남자가 없어. 살 냄새를 맡거나 눈을 똑 바로 쳐다본 사람도 없어.”

“그래. 미안해.”

“제발 미안하다는 소리 좀 말아요. 나는 지금 언제쯤 열찬씨를 만나러 갈까,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음식을 먹으며 언양의 작천정이나 석남사 어디로 같이 놀러갈까 궁리를 한참이나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판에.”

“미안해.”

“또 미안하다고 하네. 당신이 정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내가 가방을 꾸려 부산에 가면 되지. 당당하게 홍영순여사도 만나고.”

“엥?”

“맞아.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홍여사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래 은석인가 하는 옥철이 딸은 어쩔 거야?”

“어쩌기는 뭐? 그런데 당신 왜 꼭 고모부라도 되는 것처럼 묻는 거야?”

“아니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혹시 당신에게 거치적거리거나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좀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야. 피차 외로운 처지에 서로 의지도 하고 또 내겐 유일한 말동무도 되고. 제 공부시킬 형편은 되니 돈 걱정은 없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어미역할을 대신하는 내가 살림이나 음식에 취미가 없으니 저게 나중에 시집가서 꼭 나처럼 음식이나 살림살이에 어설퍼 남편에게 핀잔을 듣고 장모격인 내가 입방아에 오를 지도 모르고 말이야.”

“...”

“공부를 잘 하는 편이라 제 앞가림이야 하겠지만 아파트 하나 정도나 웬만큼 먹고 살 만큼 살림도 물려줄 작정이야. 그래 봤자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제 아비나 수시로 바뀌는 새엄마들 때문에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래 그런 건 차차 살면서 생각하고.”

“그래요. 오늘은 예까지 하지. 아이 올 시간이 되었어요.”

“알았어.”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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