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2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33)

이득수 승인 2024.04.10 08:00 의견 0

14. 송도와 진주여자(33)

정병진씨가 이의를 제기하는데

“왜? 당시의 담당과장인 나와 담당자인 우리 정계장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주 리얼한 이야긴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 잔뜩 긴장했다 문득 웃음이 터지는 휴게실 같은 지면이잖아? 좌우간 창훈씨가 한번 읽어보지.”

하고

3-8.뉴질랜드 참전기념비

여러분, 혹시 6.25때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한 혈맹이 된 참전 16개국을 다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또 그 16개국 중의 하나인 뉴질랜드가 먼 남반부에 위치한 줄은 잘 모르더라도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전설에서 유래한 “비바람이 잠든 바다 잠잠해져오면...”으로 시작되는 <연가>라는 노래는 한두 번 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로 그 뉴질랜드군인이 처음 한국에 상륙한 지점이 바로 송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001년 봄 주로 뉴질랜드 최대도시 오클랜드의 재향군인회의 한국전참전용사들이 참전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뉴질랜드영사와 서구청관계자들이 암남동일대의 여러 지점을 답사하여 송도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우뚝한 바위언덕에 뉴질랜드에서 실어온 거북이 모양이랴 거북바위(터틀 록)이라 불리는 기념석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서구청에서는 지리산에서 나는 좋은 기단석을 구해다 놓고 주변의 화단까지 말금히 단장하여 기념식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기념식 당일 그만 포복절도할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당일 행사는 뉴질랜드 참전용사는 물론 주한영사와 국방장관에 부산시장과 서구청장이 참석하여 기념사를 하기로 식순이 짜였습니다. 이에 부산시의 국제협력담당사무관이 직접 영어와 한국어 겸용의 진행을 대비하여 2시간 전에 현장점검을 나왔을 때입니다.

기념석을 감싼 하얀 제막용 커버를 다시 맞추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념석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아 양국의 내빈들이 끈을 잡고 제막을 하기엔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념석 위에 제막커비를 덮을 높은 구조물을 세우고 커다란 제막커버와 끈을 달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지라 급한 대로 커버의 길이만큼 붉은 나일론끈을 잘라서 국제시장포목점으로 직원을 출발시켰습니다.

이어 버스로 뉴질랜드 재향군인들이 도착, 건장한 백인남자는 물론 뚱뚱한 마오리족 여성까지 송도항의 절경을 보고 원더풀을 연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커버는 오고 있는지 전화를 하니까 담당직원은 가고는 있는데 송도아랫길이 정체되어 꼼짝을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오토바이택배로 급히 보내라하는 사이 시장과 구청장, 그리고 뉴질랜드의 영사와 국방장관도 도착했습니다.

우선 내빈들에게 주변경관을 안내하면서 교통경찰관에서 하얀 천을 실은 오토바이가 오면 빨리 안내하라고 시켰습니다.

마침 시야에 오토바이 한대가 나타나 교통경찰이 순찰차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택배기사는 교통단속하려는 줄 알고 기념식장소를 지나 동물검역소 쪽으로 쏜살처럼 내빼벼렸답니다. 휴대폰으로 연락해 동물검역소정문으로 되돌아온 기사에게 커버를 받아들고 3백 미터 가까운 오르막길을 직원3명이 릴레이 하듯 뛰었습니다. 그중의 2번 주자는 상당히 푸짐한 몸매의 여직원이었으니 참 볼만 한 풍경이었겠지요. 그렇게 행사는 잘 마쳤습니다만 당시의 관계직원들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이마에서 진땀이 솟는다고 합니다.-

다 읽고 난 창훈씨가 숨을 고르며

“아주 재미있는데요. 국제우호를 상징하는 기념비에 직접 발로 뛰는 하위공무원 실무자들의 애환이 실렸고 말입니다. 스토리텔링집 전체의 숨구멍이랄까 활력소가 될 것 같습니다. 절대로 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해서 정 계장이 수긍을 하자

“자, 이건 창훈씨가 뭐라 하기 전에 내 스스로 자수하는 건데 마지막 3-13.<골목과 계단과 연두색 쪽문>이 문젠대 이건 누가 보아도 스토리텔링이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내용이지. 그렇지만 이건 수많은 스토리 중에 유일하게 다 늙은 노인인 내가 아닌 젊은 여성, 왜 대학생인턴 그 머리가 치렁치렁한 아가씨, 벌써 이름은 잊었지만 대단히 총명하고 당돌하며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재기발랄 풋 냄새가 푹푹 풍기던 여학생이 착안한 내용인데 말이야.”

하자

“그래서 그랬군요. 내용이 참 신선하다 했더니.”

하면서 또 창훈씨가 읽기를 시작하는데 하도 진지한 모습이라 둘은 차마 말리지도 못 하고

3-13 계단골목의 연두색쪽문

자, 여러분 여기 잠깐 멈춰봅시다. 바닷가도 숲속도 아닌 별 신통한 볼거리도 없는 곳에 왜 세웠는지 궁금하십니까?

아니지요. 아까 이 암남공원로구간을 아홉 구비길이라고 했는데 해안선을 따라 꾸불꾸불한 이 길이야 보는 시각에 따라 일곱 구비, 아홉 구비, 열두 구비로도 보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아홉 구비란 말은 이제껏 우리가 보아온 패총, 시비, 기념석, 숭어바위와 부산포해전과 대마도관망 그리고 번듯한 음식점등 인생살이의 아홉 구비를 뜻한다고 보아야겠지요.

먼저 길 건너 저 작은 골목길을 한번 보십시오. 저 비스듬한 골목의 촘촘한 계단을 올라 나뭇가지에 가려 침침한 슬레이트집으로 들어가면 이따 퇴근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허리가 구부정한 초로의 어머니가 지금 막 저녁밥을 짓는 고등어 굽는 냄새가 풍겨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좀더 유심히 골목 오른쪽을 보면 희한하게도 아주 밝고 투명한 연두 빛 쪽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연약하며 부드러운 빛깔인 연두 빛, 저 쪽문 안에는 아마도 호기심 많은 소년이나 눈빛 맑은 소녀하나가 동화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자, 이제 뒤로 돌아봅시다. 우리가 지나온 번듯한 음식점들과 높다란 아파트 사이로 짓다 중단된 칙칙한 건물뼈대와 안전펜스 그리고 잡초가 우거진 공터가 보이고 그 공터에 작은 텃밭을 일구는 아주머니가 보이시죠.

그리고 등 뒤에는 고물장수가 모아놓은 박스와 철판조각과 담에 기대놓은 리어카도 두 대나 보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휘황한 야경, 번쩍거리는 의상, 황홀한 보석 같은 화려한 현대문명에 열광하거나 깊은 땅속이나 전설 속에 뭍인 미라나 옹기파편을 뒤지는 고고학에 열중하면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이제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저 평범하고 서정적인 광경에 왜 무심한지 모를 일입니다.

이 오붓한 항구가 점차 화려한 도시로 발전해가면서 저 오붓한 골목길과 슬레이트집, 그리고 이 너저분한 공터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왠지 편안한 우리의 주변과 그런 공간은 차차 사라지고 말겠지요.

쓰윽 주변을 한번 돌아봅시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이며 우리시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낭독이 끝나자

“아이구 배가 꼬르륵거리네. 국장님 밥 먹고 하지요.”

정병진씨가 신호를 보내고

“그래 다 먹고 살자는 일인데. 아무튼 아깝긴 하지만 본래 주제와 좀 동떨어지니 일단은 버리기로 하지. 자, 오늘은 저녁이나 먹으러 가고 하루 쯤 쉬어 제 4구간을 마무리하기로 하세.”

그날은 좀 일찍 퇴근을 해서 저녁 9시경에 전화를 했는데

“어디야? 오늘도 대숲이야?”

엄청 반갑다는 목소리였다.

“응. 아파트대숲.”

“그럼 옆에 아무도 없겠네.”
“물론.”

“그럼 내 어깨를 껴안고 볼을 좀 비벼 주.”

“이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야. 옛날처럼 당신을 느껴보고 싶어.”

“어떻게. 볼도 비비고 뽀뽀도 하고 또 땀이 흠뻑 젖도록...”

“무슨 그런 심한 이야기를? 혹시 옆에 사람 없나?”

“응. 은석이는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전화가 왔어. 그러면서 자기 없는 사이에 절대로 이열찬 아저씨와 전화를 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

“그래서 열찬씨가 바로 내 옆에 누워있는 상상을 했어. 눈을 세모꼴로 만들어 홍건적처럼 덤벼드는...”

“홍건적이라?”

“그래요. 전쟁터의 여인들처럼 사정없이 사내들에게 겁탈당해 온몸이 넝마처럼 너덜너덜 찢어지는 상상.”

“저런?”

“열찬씨. 난 정말 다시 남자를 느껴볼 수 없을까? 다시 아이는 밸 수 없더라도 남자의 뜨거운 입김에 엿가락처럼 녹아버리는 기분 말이야.”

“만약 열찬씨가 옆에 있다면 섹스도 해보고 싶어.”

“그 무슨 해괴한 소리를? 우린 이미 다 늙었잖아?”

“아니야. 일찍 이혼한 언니와 또 젊어 사별한 언니와 셋이 어울리며 들은 이야긴데 남자와 함께 자며 남자를 느끼는 게 그렇게 황홀하고 좋다면서?”

“...”

“난 그때 열찬씨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어 금방 숨이 넘어갈 듯이 덤벼들면 남녀관계가 의례 남자가 기분 좋게 여자가 응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렇게 해야만 아이가 생기니까 말이야.”

“그랬나? 그 땐 우리가 너무 어려서 그런 느낌도 모르고 또 상대를 배려할 줄도 모르고 그냥 민망하고 부끄러운 그 행위 자체에 중독이 된 것 같애.”

“그건 그렇고 열찬씨, 사이버섹스란 소리 들어봤어?”

“응. 들어보긴 한 것 같은데.”

“여보, 우리 지금 그것 한번 해보면 어떨까?”

“어떻게?”

“서로 전화기에 대고 뽀뽀하는 소리도 내고 애무하는 소리도 내고 거친 숨소리도 내고...”

“어휴. 무서워라. 옥자씨, 이제 난 그런 젊은 사람이 아니야. 호랑이도 늙어 이빨이 빠지면 애완용고양이와 다름없다고 내가 바로 이빨 빠진 사자야. 난 이미 남자가 아니야.”

“아니 그렇지 않아. 요즘은 의술이나 약품 같은 보조제가 좋아 결코 성 불능 따위는 없어. 또 내가 간호사 출신이라서 얼마든지 젊음을 되살릴 수 있어.”

“그만 해. 옆에서 누가 듣거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갈까 봐 소름이 끼치네.”

“아니 대밭이라면서?”

“당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 못 들어봤어.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을 타고 억울하게 죽은 모자장이의 이야기가 밤마다 서라벌에 퍼져나가는 이야기...”

“아니 왜 이야기를 자꾸 엉뚱한 데로 끌고 가? 난 지금 한창 몸이 달아오르는데.”

“미, 미안해.”

“또 미안하다는 소리?”

하면서도 사내도 제대로 알기 전에 사내로부터 버림을 받고 평생 그 상처를 벗어나지 못 한 여자, 한 여자로서 아이를 낳아보지도 못 하고 남자를 느껴보지도 못 하고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린 예순한 살 환갑이 된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래. 내가 너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지. 미안해. 그렇지만 열찬씨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감정을 잡아봐. 내일은 꼭 사이버섹스에 성공해 기어이 남자를 느껴보고 싶어.”

“...”

“추운데 어서 들어가요. 그리고 내 꿈 좀 꿔요. 아니 내 꿈속에 찾아와요.”

“그래 미안해.”

“당신이 베도록 옆방에 은석이 베개를 가져다 놓을 테니 꼭 와!”

“알았어.”

가방을 꾸려 부산으로 오거나 영순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알린다는 현실적인 위기는 넘어간 것 같았지만 이젠 엉뚱하게도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은밀한 이야기로 빠졌으니 오히려 더 대응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이 무책임하게 한 여자의 전도를 망쳐버린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비록 그녀를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 했지만 처음부터 나쁜 생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변명 같지만 가슴 가득히 순영씨를 품고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 한 번의 반응도 없는 짝사랑이라 젊은 혈기에 충동적인 사랑에 빠진다고 뭐 크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지 삶에 자신이 없다고 전도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2년간이나 몸과 마음을 바친 여자를 버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그야말로 무슨 가요의 가사처럼 이유 아닌 이유가 아닌가 말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은 아니지만 종잡을 수가 없는 애매한 불안에 늘 찝찝했지만 아무튼 그런대로 아슬아슬 하루하루가 넘어가기는 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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