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 년간 문밖 나서지 않으니(一十五年不出門·일십오년불출문)/ 경조사와 안부 묻는 일 모두 어그러졌다네.(全虧弔賀問寒暄·전휴조하문한훤)/ 남 보내기 진정 괴롭지만 아이들로나마 조문하니(替人良苦勤兒子·체인량고근아자)/ 곡 하는 가난한 벗은 초야에 지내고 있다네.(爲哭貧交宿野村·위곡빈교숙야촌)
세 달 남짓 달마다 어두운 흙비 가득하니(三餘式月鎭昏霾·삼여식월진혼매)/ 부고에 자주 놀라며 옛 생각 떠올린다네.(幽問頻驚感舊懷·유문빈경감구회)/ 조문하고 축하함이 오히려 편안할 터인데(弔慶猶爲尹和靖·조경유위윤화청)/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홀로 묻혀 지내는가?(我何人也獨沈埋·아하인야독침매)
위 두 시는 유최진(柳最鎭·1791~1869)의 「추사 김정희와 산천 김명희 형제의 초상에 아이를 대신 보내 곡하다」(替送兒子哭秋史山泉伯仲喪·체송아자곡추사산천백중상)로, 그의 문집인 『초산만고(樵山漫稿)』와 『여항문학총서』에 들어있다. 『초산만고』는 유최진이 1856년에서 1857년 사이에 지은 시를 모아 놓은 문집이다.
유최진은 「자서전」을 지은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김정희(金正喜·1786~1856)·김명희(金命喜·1788~1857) 형제의 부고를 연이어 들었다. 그가 64세인 1856년 되던 해에 작성한 「자서전」은 산문집인 『초산잡저(樵山雜著)』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 짧은 전기이지만 그 속에 유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성장 과정과 주요 사건, 삶에 대한 감회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위 시를 지을 무렵 유최진은 여항문인 모임인 ‘벽오사(碧梧社)’ 활동을 할 때였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보면 여전히 집밖으로 잘 나서지 않았던 듯하다. 이에 아이를 보내 대신 조문과 곡을 하게 하면서 그 놀라고도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유최진은 노년기에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을 하나 둘씩 떠나보내면서 쓸쓸함과 허무함에 젖어들었다.
대체 유최진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일까? 그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그의 본관은 진주로 자는 미재(美哉), 호는 학산목재(學山木齋)·초산(樵山)·정암(鼎庵)이다. 벼슬은 직장(直長)에 그쳤다. 당대의 유명한 서화가 조희룡, 의관(醫官) 이기복 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김정희를 따라 강원도·금강산 등 명승지를 편력하기도 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의업을 이어온 중역중인(醫役中人)이었다.
유최진은 1816년 감제(柑製·해마다 제주도에서 진상하던 황감(黃柑)을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내리고 거행하던 과거)에 입격한 한 뒤 직장을 지냈는데, 이 외에는 관직 기록이 없다. 그는 오히려 추사 집안의 측근으로서 국내외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김정희가 강원도와 금강산 등으로 포사(曝史)를 떠났는데 이때 유최진이 동행하였다.
금강산 유람 이후 유최진은 1822년 10월에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이 정사로 떠나는 동지사행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연경을 방문하였다. 연경에 가 청나라 문사들과 교유를 하면서 견문과 지식을 넓혔다.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이념증(伊念曾)과 장심(張深), 주달(周達) 등과는 나름 깊은 우의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설악·금강의 명승을 누리고 밖으로는 중국의 풍물과 인사를 접했던 그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추사 집안과의 인연으로 크게 빛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행복이 오래가진 못하였다 마흔을 넘기면서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겪었다.
중년기에는 부모와 형제를 잃고서 세상 모든 인연을 끊은 채 몇 십 년간 숨어 지냈다. 증조부부터 이어져온 의원가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지만 유최진은 의원보다는 문인이자 서화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또한 중년기에는 부모와 형제를 잃고서 세상 모든 인연을 끊은 채 몇 십 년간 숨어 지냈다.
위 시를 지을 즈음에는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김선신과 김선, 김노경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믿고 의지했던 김정희와 김명희 마저 세상을 버렸기 때문에 자괴감과 상실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유최진이 청산(淸山) 김신선(金善臣·1775~?) 문하에 들어간 뒤 스승을 통해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추사 집안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김려(金鑢·1766~1821)·김선(金䥧·1772~1833) 형제와도 절친하였다.
대체로 그는 1843~1847년 바닷가에 숨어살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그는 마치 일기를 쓰듯이 거의 매일에 걸쳐 시를 지었다. 또한 이 시기 빼놓을 없는 일이 있는데, 바로 벽오사의 결성과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1847년(헌종 13) 봄 조희룡·전기·유숙·오창렬·이기복·이팔원 등 당대를 주름잡던 여항의 문사들과 동인인 벽오사를 조직하여 시와 그림을 논하였다. 이 모임은 1870년대까지 존속한 여항문인의 동인이다. 구성원은 30여 명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초산만고(樵山漫稿)』와 『초산잡저(樵山雜著)』, 『병음시초』·『기유시초(己酉詩艸)』 등이 있다.1869년에는 79세의 나이로 조희룡과 함께 오로회(五老會)를 조직했으며,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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