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계치(機械癡)’다. 기계나 도구를 다루는 데 서툴고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집에 예초기가 있어도 낫으로 텃밭이나 집 주변의 잡초를 벤다. 물론 전업 농부라면 작업에 드는 에너지와 효율을 따져야 하기 때문에 예초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기계치인 건, 기계나 도구를 잘 몰라서 흥미를 느끼지 않는 탓일까? 아니면 흥미를 느끼지 않으니 모르게 된 탓일까?
‘아는 만큼 보인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 <책을 펴내면서>에서 처음 등장했다며 뭇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명구(名句)이다. 그러나 유홍준이 직접 한 말은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이다.
그리고 유홍준은 조선 정조 시대 문인 유한준(兪漢雋,1732~1811)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따라서 유홍준도 유한준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홍준과 유한준의 말에서 진액(엑기스, extraction)을 뽑아 언중(言衆)이 만들었음 직하다. 일종의 관용구인 것이다. 영어에서도 거의 같은 표현이 있다. ‘The more you know, the more you see.'
한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100만 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million-seller)’인 덕분인지, 유홍준의 인용구(유한준의 말)는 언뜻 보면 그럴듯하나, 전혀 다른 뜻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효형출판/1999)는 미술과 관련 작가, 작품, 미술 동네, 감상에 대한 이야기다. 감동 깊게 읽었다. 그 책의 한 꼭지 <사랑하면 보게 되는가>(p.249)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베스트셀러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인상 깊은 인용구 한마디가 나온다. 이제 너무도 유명해진 화두가 된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되고…’라는 것.
과연 그렇다. 눈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다 볼 수 있지만, 본다고 해서 모두가 아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결국은 자기가 가진 애정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세상의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가.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이다. ‘Seeing is believing’이란 격언도 있다. 영어의 see는 본다는 뜻이고 I see는 나는 안다는 뜻이다. 이때 본다는 말 속에 관찰하고 인지하고 판단한다는 뜻이 숨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아는 것 못지않게 본다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위 인용문 그 자체로는 내용도 충실하고, 의미도 깊다. 그리고 논리도 정연하다. 문제는 논지의 바탕인 인용구를, 원문과 다르게 인용했다는 점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를 손철주는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되고…’로 인용했다. 심각한 인용 오류이다. 잘못 인용으로 뜻이 심대하게 왜곡된다.
첫째로 인과관계가 정반대로 된다. 원문은 사랑이 원인이고, 앎은 결과이다. 인용문은 거꾸로 앎이 원인이고 사랑은 결과이다.
둘째로 ‘보이다’를 ‘보다’로 잘못 인용했다. ‘보다’와 ‘보이다’의 함의는 아주 다르다. 문법적 설명을 떠나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언중은 언어 감각만으로도 그 차이를 안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가 이야기의 중심이므로, 좀 더 정밀하게 따져보자.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 ‘나는 그림을 봤다’는 내가 능동적으로 시선을 보내 관찰한 것이고, ‘그 그림은 잘 보였다’는 조명이 좋거나 구도가 좋아서 내 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다.
‘아는 만큼 본다’는 내가 알고 있어서 능동적으로 찾아보고 이해하는 것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알고 나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 곧 인식의 변화를 말한다.
곧, ‘아는 만큼 본다’는 내가 적극적으로 지식을 활용해 관찰하는 것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지식이 내 인식을 바꿔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문의 유한준은 ‘앎’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인용문의 손철주는 ‘봄(보는 행위)’을 강조하게 되었다. 애당초 ‘보는 행위’를 강조하려 했다면, 손철주는 인용문을 잘못 골랐다.
앎은 나를 바꾸고, 내가 바뀌면 세상도 달리 인식된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아는 만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앎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조용한 힘이다.
나는 기계치다. 공작 기계나 도구 사용에 별 흥미가 없다. AI도 결국 기계다. 다만, 지식의 영역에서는 이미 나보다 더 똑똑한 기계다. 그리고 지금은 AI 시대다. 더 이상 AI를 멀리할 수 없는 시대다.
여기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와 ‘알면 사랑하게 된다’ 중 그대는 어느 쪽인가. 사람들은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 것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앎이 먼저이고, 사랑은 그 뒤를 따른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AI치(癡)’나 ‘AI맹(盲)’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AI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알아야 흥미가 생기고, 흥미가 생기면 사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아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 책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