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억새, 이 강산의 대표식물

에세이 제1147호(2020.11.7)

이득수 승인 2020.11.06 23:24 | 최종 수정 2020.11.06 23:33 의견 0
10월 초 수수하게 언덕을 덮어가는 억새

금수강산으로 지칭되는 우리나라의 산야를 뒤덮은 대표적 식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보통 소나무를 들 것입니다. 소나무는 애국가 2절 <남산위의 저 소나무>로 나오는 아주 친밀한 나무이기도 하지만 사대부의 지조를 으뜸으로 치던 조선시대에는 한겨울의 눈 속에서 푸르름을 잘 지킨다고 송백(松柏), 즉, 소나무와 잣나무를 으뜸으로 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건축용 기둥과 서까래를 내어주고 땔감이 되기도 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장승의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최고급 송이(松茸)버섯에 죽은 소나무뿌리에서 나오는 영약 복령(茯苓)까지 참으로 쓰임새도 다양해 과히 대한의 소나무라 할 것입니다.

그밖에 산야를 많이 차지하는 것이 굴밤나무에서 떡갈나무, 신갈나무를 거쳐 상수리나무와 참나무에 이르는 참나무과 식불들입니다. 그들의 열매 도토리와 굴밤을 옛날부터 사람과 다람쥐의 훌륭한 식량이 되어왔으므로 신임사또가 부임하면 관할의 야산에 굴밤과 참나무를 많이 심어 흉년에 백성들이 도토리로 연명하도록 구황(救荒)목으로 심었답니다. 또 일제 말에서 6.25의 피폐한 시절에는 참숯을 굽는 재료로 심기도 했는데 온 국민이 다 넉넉한 지금은 숯이나 구황식물로서 가치가 없어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구황식물로 칡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칡은 학교 앞에서 팔정도로 매우 훌륭한 간식거리이자 그 가루를 빼 칡 국수를 만들고 칡즙을 장복하는 듯 용도가 많았지만 그 역시 민도가 높아지면서 아무도 잘 캐지를 않자 산야는 물론 들판과 마을 빈집에 이르도록 마치 침략군처럼 여기저기를 점령하고 전봇대를 타고 올라 한국전력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지만 이 땅의 대표수종이 되기에는 무언가 좀 아쉽습니다.
  

노파처럼 하얗게 세어버린 10월 말의 억새

그에 비해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 산하에 넓디넓게 분포되어 줄기차게 이 땅, 특히 만물이 다 엎드려 쓸쓸한 겨울산하를 지킴에는 억새만한 식물이 없습니다. 억새는 키가 크고 풀잎의 끝이 날카로워 어린아이들이 쇠꼴을 베면 많이들 손을 베는 사나운 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걸 보면 혀에 억새를 먹기 좋게 수많은 돌기를 가진 소로서는 가장 만만한 별식인 모양입니다. 거기에다 그 줄기가 곧고 길어 옛날에는 높은 산의 억새를 배어 (새, 또는 쇠라고 함) 이엉을 역어 지붕을 이으면 짚으로 이은 지붕은 3, 4년에 갈아입는데 비해 그의 반영구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오래된 지붕에 구멍을 뚫고 겨울철의 살찐 참새들이 숨어들어 시골아이들의 사냥거리가 되고요.

명촌리 역시 억새의 나라로 겨울철 바들못을 비롯한 못이나 고래뜰을 비롯한  들을 걸으면 그 길가에 반드시 한 무리씩 피어 하얀 꽃술을 휘날리며 행인을 반기는 게 이 땅의 토착식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행가 짝사랑에 나오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를 두고 억새다 또는 다른 어떤 종류의 새라고 논란이 많지만 저는 억새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들에 나가면 소슬한 가을바람에 나부끼며 하얀 손을 흔드는 억새를 보면 누가 보아도 가을맞이 으악새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9월 초 갓 핀 자주빛 꽃 억새  

등산이나 시골길을 좀 산책하는 사람이라면 더러 억새를 만나고 대체로 하얗게 머리를 풀고 바람에 홀씨를 날리는 모습을 상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억새는 9월초의 자주 빛 꽃에서 10월초의 중년처럼 하야스름 수수한 꽃송이, 10월말의 허옇게 늙어버린 억새, 홀씨를 바람에 날리는 11월, 발가벗고 바람에 떠는 한 겨울 등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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