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8)차가 벗들을 부르다

조해훈 승인 2019.05.10 15:21 | 최종 수정 2019.05.10 15:53 의견 0
황근희(왼쪽) 시인과 부인(가운데), 정성기 시인이 광목을 깐 멍석 위에서 덖은 찻잎을 비비고 있다.
황근희(왼쪽) 시인과 부인(가운데), 정성기 시인이 광목을 깐 멍석 위에서 덖은 찻잎을 비비고 있다.

찻잎들이 한창 올라온다. 제법 많이 자랐다. 소위 ‘1창2기’(1槍·2旗, 1개 창과 2개 깃발 모양을 한 찻잎을 일컬음)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다.

요즘 손이 빠른 분들은 한 사람이 하루에 많게는 5kg까지 찻잎을 딴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평지에 있는 밭차일 가능성이 많다. 야생산차의 경우 주로 산비탈에 있어 찻잎을 따는 일이 녹록하지 않다. 게다가 야생산차는 찻잎이 평지 차만큼 많지 않아 많은 양을 채취하기 어렵다. 그래도 필자 혼자서 종일 잎을 따면 1kg은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늘 ‘찻잎을 따지 못해 차를 많이 만들지 못하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이냐’라며 안타까워 한다.

그런데 어린이날인 지난 5일(일요일)에 필자의 오랜 벗들인 ‘영대글벗문학회’ 회장인 황근희(경북 구미시 경구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인 부부가 찻잎 따는 걸 도와주러 왔다. 영대글벗문학회는 필자가 대학 재학 때 활동했던 시 문학회로, 당시의 멤버 10여 명이 지금도 서로 연락을 하며 1년에 여름과 겨울에 각각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만나고 수시로 번개모임을 한다. 찻잎 딸 손이 모자란다는 걸 알고 황 회장 부부가 일부러 시간을 내 1박2일로 지원 온 것이다. 황 회장 부부는 필자의 집에 도착하자 모자를 쓰는 등 채비를 한 후 바로 필자와 함께 차산으로 올라갔다.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대글벗문학회’ 회장인 황근희 시인이 필자의 차산에서 찻잎을 따고 있다.
‘영대글벗문학회’ 회장인 황근희 시인이 필자의 차산에서 찻잎을 따고 있다.

‘영대글벗문학회’ 황근희 회장 부부 찻잎 따 줘

황 회장 부부는 찻잎을 처음 채취해보지만 부인인 안윤숙 여사는 손이 아주 빨랐다. 특히 안 여사는 평소에 일반 식물과 나무에 대해서는 이름부터 용도, 생태 등 모르는 것이 없어 식물학자 저리가라할 정도로 박식한 사람이다. 산이라 ‘깔따구’란 놈들이 얼굴에 달라붙어 귀찮게 하는데도 너무 열심히 찻잎을 따 미안했다. 산 속에서 혼자 하루종일 찻잎을 딸 때 가끔 일어나던 외로운 감정이 전혀 없었다. 든든한 벗의 덕이었다. 오후 7시 조금 넘어 어둑해져서야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다.

오후 7시30분에 필자의 마을 건너편 위쪽인 모암마을 소재 식당인 모암휴게소에 닭구이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같은 문학회 멤버인 정성기 시인이 경남 함양에서 넘어 오기로 했다. 정 시인은 울산에 거주하지만 지난해 함양 마천 오도재 넘어가기 직전 마을에 큰 산을 구입해 주말이면 고사리를 채취하기도 하고 산을 가꾸고 있다. 우리가 식당에 들어가 앉으니 정 시인이 도착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에 시집을 발간해 화제를 모은 시인이다. 정 시인의 부인 역시 대학 때 같은 문학회에서 활동했다.

닭고기를 맛있게 구워먹고 녹두를 넣어 끓인 닭죽까지 한 그릇씩 비운 후 필자의 집으로 와 차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아 필자가 오전에 채취해 놓은 잎을 합쳤다. 2kg은 될 듯 싶었다.

황근희 시인(오른쪽)과 정성기 시인이 차솥에서 찻잎을 덖고 있다.
황근희 시인(오른쪽)과 정성기 시인이 차솥에서 찻잎을 덖고 있다.

정성기 시인 합류해 함께 차 덖고 만들어

차솥에 불을 올린 후 필자가 먼저 차 덖는 시범을 보이자 황·정 시인 두 사람이 함께 덖었다. 두 사람 모두 손이 재빠르고 덖을 때 잎을 양손으로 들어 흩뿌리듯이 하는 걸 보곤 필자는 “차 덖기의 달인 같다. TV에 나와도 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 덖어보지만 그만큼 잘 한다는 의미였다.

덖은 찻잎을 광목을 깐 멍석 위에 올려 얼른 펴 늘었다. 찻잎의 뜨거운 열기가 좀 가시자 비볐다. 안윤숙 여사도 거들었다. 비빈 잎을 다시 솥에 넣어 또 덖었다. 이번에는 안 여사가 남편인 황 회장과 함께 덖었다. 정말이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덖었다. 두 번째 차 덖기가 끝나자 이제 세 사람이 알아서 찻잎을 펴 늘어 뜨거운 기운이 빠지자 비볐다. 역시 머리와 눈치가 있는 벗들이어서 두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정 시인은 “여기가 어느 섬의 노동착취 현장이가? 노동부에 고발하기 전에 막걸리 가져온나”라며 농담을 했다. 차 만들 때는 잡내가 들어가면 안 되는 걸 빤히 알면서 정 원장이 처음 차 만드는 어떤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필자(왼쪽 첫 번째)의 집에서 황근희(오른쪽에서 두 번째) 시인과 부인(〃 첫 번째), 정성기 시인이 차를 마시고 있다.
필자(왼쪽 첫 번째)의 집에서 황근희(오른쪽에서 두 번째) 시인과 부인(〃 첫 번째), 정성기 시인이 차를 마시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제다(製茶)의 달인’ 같아

세 사람 모두 ‘제다(製茶)의 달인’(?) 같았다. 솥 안에서의 작업이 워낙 빨라 찻잎이 타지 않고 고루 익어 8번까지 덖을 수 있었다. 비비는 건 다섯 차례까지 했다. 더 비빌 경우 잎들이 바스라져 가루가 많이 생길 것 같았다. 마지막 열처리 시간이 적어도 두 시간 넘게 걸려 다음 날 필자가 하기로 하고 “자러가자”고 했다. 그래도 시간이 자정을 넘어섰다. 모두 고생이 많았다. 늘 차일을 하는 필자도 힘든데 처음 찻잎을 따고 제다를 한 벗들이야 얼마나 피로했을까? 더군다나 황 회장은 지난 밤에 일이 있어 한 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황 부부는 2층 방에, 정 시인은 1층 중간 방에 자러 들어갔다.

다음 날인 6일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필자가 만든 ‘함조차’(咸趙茶)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이날이 일요일이어서 이날 월요일이 대체휴무일이었다. 정성기 시인은 “함양에 가서 작업 좀 더 하다가 울산으로 넘어가야겠다”며 먼저 일어섰다. 정 시인이 떠나고 나서 황 회장 부부는 “찻잎을 조금 더 따주고 가야겠다”며 차산으로 올라갔다. 부지런하고 속이 깊은 황 회장 부부는 그렇게 찻잎을 더 따주곤 구미로 향했다. 일부러 필자를 도와주겠다고 바쁜 가운데 먼길을 달려와준 황 회장 부부와 정 시인에게 미안했으며, 마음의 빚을 많이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처럼 눈을 맞추지 않아도, 속을 드러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이해해주는 오랜 벗들이 있어 드물게 행복한 사람이다.

<역사한문학자·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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