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이런 것인가? (2)오복(五福) 중 제일복(第一福)은?

조송원 승인 2020.10.01 11:19 | 최종 수정 2020.10.01 12:10 의견 0

“이빨은 오복에 들어도 자식은 오복에 들지 않는다.” 초중고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육사 교관을 하던 중 통혁당 사건으로 더럭 무기수가 되었다. 이런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중은 오죽 복잡했을까? 자식복은 오복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좀은 위안이 되었을까?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여인은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족쇄 때문에 죽는 날까지 남자에 매여 살아야 했다. 심지어는 이름도 없어 족보에는 남편 이름만 실렸다. 그러나 허초희(許楚姬.1563~1589)는 이름뿐 아니라, 당당히 호(난설헌蘭雪軒)와 자(경번景樊)까지 가졌다. 그러나 만난 남편은 자기보다 뛰어난 아내에게 자존심을 상해하며 밖으로만 배돌았다. 게다가 아들딸이 어려서 죽었다. 초희가 감당한 스물여섯 해, 시대의 제약에선 비껴 설 수 있었지만, 가정의 한계에서 버텨낸 세월로서는 요절이랄 수 없는 긴 인생이다. 이 시대를 뛰어넘은 여성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남편을 만나는 ‘남편복’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한 세상 살아가는 데 아내 혹은 남편과 자식보다 행복에 더 밀접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마는, 이빨은 물론 남편복 혹은 처복과 자식복은 오복에 들지 않는다. 그럼 대체 오복이란 뭐란 말인가?

잘 알다시피, 오복의 출전은 『서경』의 「주서」 홍범洪範 편篇이다. 첫째는 오래 살고(수壽), 둘째는 돈 많고(부富), 셋째는 편안하고(강녕康寧), 넷째는 덕을 베풀고(유호덕攸好德), 마지막으로 천수를 누리고 죽는 삶(고종명考終命)이다. 한데 ‘귀貴’가 빠졌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잘 산다고 말할 때, 부귀영화富貴榮華라 하지 않는가.

『서경』은 정치에 관한 역사서이다. 역사 이전의 이상시대였던 요순堯舜 두 황제와 역사시대의 이상시대였던 우禹·탕湯·문무文武 삼왕, 곧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정치행적에 관한 기록이다. 『서경』의 일관된 사상은 ‘천명사상天命思想 ’이다. 곧 임금이란 하늘의 명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상이다. 하여 지존至尊은 황제나 왕뿐이다. 백성은 황제나 왕의 뜻에 복종하여 살면 오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뿐, 귀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오복은 봉건왕조시대의 산물이다.

오복의 첫 번째 특징은 ‘공짜’라는 것이다. 말 잘 듣는 백성이 되면 하늘에서 거저 공짜로 복을 내려준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회성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와 시대적 고민은 왕과 그 부림을 받는 관리들의 몫일 뿐, 백성은 그저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지극히 당대주의이다. ‘자식복’이 빠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후대는 남의 일,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오래 잘 살면 그만인 것이다.

봉건왕조시대와는 달리, 우리가 사는 시대는 국민주권시대이다. 내 삶과 사회와 국가의 주체는 내 자신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주인이므로 복을 지어야지 공짜로 받을 수는 없다. 자기 노력의 산물은 복이 아니다. 복은 공짜여야 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오복을 다시 살펴보자.

오래 삶이나 천수를 누림은 한 가지로 볼 수 있다. 건강은 상이요, 병은 벌이란 말이 있다. 건강과 질병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나온 삶의 성적표다. 하여 수壽는 복이 아니다. 둘째로 최저한의 문화생활비는 성실하게 노력함으로 벌 수 있다. 아니, 자신의 노력으로 최저문화생활비는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富 또한 복이 아니다. ‘편안함’과 ‘덕을 베풂’이 남는다.

건강하고 돈에 부족함이 없는데 편안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 ‘편안함’은 ‘덕을 베풂’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독립변수가 아니다. 유호덕攸好德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좋아하는 바가 덕’이란 뜻이다. 덕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 고통 받는 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 정도로 풀 수 있다. 이런 품성은 교육으로 길러내기 어렵다. 대개 타고 난다. 개인 노력으로도 이루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품성을 결핍해도 준법정신에는 투철할 수 있으므로 모범시민은 될 수 있다. 그러나 ‘편안함’을 갖는 것과는 별개 문제이다.

전두환 씨는 89세이고 수천억 원의 뇌물을 받았으니 장수하고 부자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편안할까. 도덕적 죄책감에서가 아니라 배신감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 결코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대척점에 선 고 신영복 선생, 얼마나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했는가. 전두환 씨와 고 신영복 선생과에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유호덕’이다. 만약 전두환 씨가 육사로 진학해 총을 들지 않고, 면서기로 사회 첫발을 디뎠다면, 아마 말년에 훌륭한 면장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일굴 수도 있었으리라.

조송원

오복은 없다. 있다면 유호덕뿐이다. 대충 말들 하는 마음이 착하다는 것, 실은 평안한 삶을 위한 엄청난 무기이다. 이것을 타고난 사람, 그가 정녕 ‘복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다. 각박하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 허초희와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1954). 튜링은 당시에는 범죄로 취급되던 동성애 혐의로 1952년에 체포되어 중대 외설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감옥과 화학적 거세 중 후자를 택해 자택연금 중 청산가리를 투입한 사과를 먹고 42살에 자살했다.

천재는 그 타고난 천부적 재능으로 인해 시대적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는 것은 어쩜 인간사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천재天才와 불행을 천부적으로 양어깨에 걸쳐 멨다고나 할까. 그러니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으로서 천재를 마냥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