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이런 것인가? (4) ‘노가다’와 ‘글쟁이’의 차이

조송원 승인 2020.10.09 21:11 | 최종 수정 2020.10.09 21:23 의견 0

“봐라! 우린 거지하고 다른 기라. 우린 쇠기름을 건져서 버리지만, 거지는 기름을 더 달라고 하는 기라.”

그날 밤 시인 이현우(1934~미상)*와 친구 둘은 코카콜라 병에 든 막소주와 돼지껍데기 안주로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다. 주위 손님들은 거지들이거나 거지를 간신히 면한 사람들이었다. 셋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진탕 마시고, 시장 뒷골목 빈 가게 2층 거지꼴의 장돌뱅이 합숙소에서 세상모르게 잤다.

다음날 새벽 시인은 친구 둘을 데리고 자신의 단골 해장국집으로 갔다. 김장배추 파치에서 골랐을 법한 배추 시래기와 간간이 선지 부스러기가 보이는, 멀건 해장국이었다. 해장국에는 쇠기름 몇 조각이 둥둥 떠 있었다. 셋은 그 쇠기름을 건져 바닥에 버렸다.

“현우야, 우린 거지구나.”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하다말고, 친구가 비탄조로 말했다. “머락하노! 우린 거지가 아닌 기라!” 현우가 정색을 하며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내질렀다. “거지하고 같이 자고 거지하고 똑같이 먹으니 거지지 뭐야.”

“아주머니 기름 좀 더 줘요” 거지 소년들은 자기들의 국그릇을 도로 내밀었다. “이놈들아, 기름덩어리 많이 넣어줬잖아!” 고 하면서도 아주머니는 무쇠 솥의 기름을 한 국자씩 거둬 소년들의 국그릇에 부어 주었다.

이런 거지들을 가리키며 시인 이현우가 득의만면 외친 말이다(강홍규,『관철동 시대』). 1967년의 일이다.

미쳐야 미친다? 그렇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불광불금 不狂不及). 어떤 특정 일에 미칠 정도로 매달리면, 분명 일가견一家見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그 일가견이 현실적 성공을 보장하지 못할뿐더러, ‘돈’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있다. 도끼가 부실하든지 나무가 오지게도 견고한 탓이다. 그러나 백 번 아니 천 번을 찍어서 사랑은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일가견을 터득하는 이치다.

한 가지 일에 인생을 거는 ‘미침(狂)’은 글자 그대로 광기의 소산일 수도 있고, 열정에서 비롯함일 수도 있다. 지난날을 어린 시절까지 톺아보니 ‘현재의 나’를 규정한 작용인作用因은, 광기와 열정은 하위범주이고, 주인공은 ‘데모니시(dämonisch)’**다. 한마디로 나는 ‘지금의 나’를 살도록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말이다. 내 성찰적 이성까지도 이 데모니시를 합리화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글쟁이’이라고 자칭한다. 작가라는 뜻과는 좀 다르다. 글과 관련된 사람이란 뜻이다. 입에 풀칠하고 책값 벌기 위해 시간의 30%쯤 쓴다. 50%는 읽는 데 소비하고, 20% 정도만 끼적거린다. 하지만, 시간의 과반을 글과 관련돼 있는 삶이니, 내 정체성으로 ‘글쟁이’라 함은 마음에 걸림은 없는 일이다.

국문과가 아니라,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다. 한 지붕 밑에 있지만 문학과 어학은 번지수가 한참 다르다. 어학은 사회과학에 속한다. 국문학과 국어학은 짬뽕과 신발만큼의 거리가 있다. 나는 국어학 전공이다. ‘-장이’는 기술자임을 나타낸다. 미장 기술자 미장이, 그리고 땜장이, 유기장이 등이다. 반면 ‘-쟁이’는 낮춤말이다. 겁 많은 사람을 낮춰 말하는 겁쟁이, 그리고 멋쟁이, 심술쟁이 등으로 쓰인다. 글 쓰는 사람을 좀 낮게 이르는 말인 ‘글쟁이’, 변변한 글 하나 남기지도 못했고, 글로써 앞가림도 못하니, 비칭卑稱인 ‘글쟁이’가 제격이다.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다. 청년회 회원에도 50대가 청년에 속한다. 가족 노동력으로 감당할 범위가 넘은, 딸기나 수박, 상추나 취나물 등의 시설 농가는 외국인을 고용한다. 먹이는 것은 물론 숙소까지 제공해야 한다. 하여 일 년 중 몇 달만 바쁜 여느 농가에서는 수확기에 일손 구하기가 농사짓는 일보다 더 급선무가 된다.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친구가 좀 도와 달랬다. 탁월한 능력은 고사하고, 부모나 아내란 ‘식민지’도 없이, 글쟁이로서 20년 넘게 참 용케도 잘 버텨냈다. 그러나 글쟁이는, 고정수입은 쌀 한두 가마니 값이지만 읽지 않을 수 없기에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생활고의 늪에 빠진다. 책값은 물론이거니와 신문·정기간행물 구독료, 인터넷 사용료, 통신비 나아가 전기요금까지 채귀債鬼로 달려든다. 참 투입 비용에 비해 산출 소득이 너무 낮아, 영리한 사람과 범인凡人은 감히 엄두 낼 수 없는 직업이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복숭아 수확은 시간과 날씨와의 싸움이다. 제때 따지 않거나 비가 와서 수확을 못하면 물쿼져 버려 상품이 되지 못한다. 일손이 부족한데다 올해는 비가 잦았다. 발갛게 익은 복숭아, 오늘 따지 않으면 물러진다. 그런데 비가 온다. 잡으면 손이 벌어질 크기로 잘 키운 친구의 노고, 그 열매가 ‘바로 지금’ 수확하지 않으면 한해 농사가 꽝이 되는 것이다. 장대비가 아니면 비 오는 날도 다른 일꾼을 재촉해 복숭아를 땄다. 투덜거린다. 이 날씨에 일을 해야 하느냐고. 주인은 말을 못한다. 경사진 과수원은 비 맞으면 더욱 미끄럽다. 엉덩방아는 수시로 찧는다. 얼굴의 빗물을 훔치다 보니, 복숭아 솜털의 알레르기로 눈두덩이 부어오른다. 이러구러 10일 만에 수확을 마쳤다. 경매가가 좋지 않아, 친구는 바란 만큼의 소득에는 한참 못 미친 돈만을 만졌지만.

마지막 날, 작업을 마무리하고 흙투성이 작업복 그대로 면 소재지 호프집에 앉았다. 주위에는 후배들이 제법 여럿이 호프를 마시고 있었다. 대체로 ‘근력’으로 생계를 꾸리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한 가족을 건사한다. 달랑 혼자의 앞가림에도 급급해 하는 나보다 분명 더 ‘생활의 고수’다. “형님들, 노가다가 비 오는 날에도 일을 하요. 그리고 오후 5시면 땡인데, 지금이 몇 시요? 7시가 넘었소.”

친구는 무안스런 표정으로 나와 그 후배를 번갈아 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호프 잔을 잡았다. 나도 반 남은 잔으로 친구 잔과 쨍하고 시원스레 쭉 들이켰다. 그리고 후배를 불렀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나는 노가다가 아니거든. 이러는 게 ‘노가다’와 ‘글쟁이’의 차이라네.”

*끊어진 한강교에서/이현우

그날,/나는 기억에도 없는 괴기한 환상에 잠기며/무너진 한강교에서/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이미 모든 것 위에는 낙일(落日)이 오고 있는데/그래도 무언인가 기다려지는 심정을 위해/회한과 절망이 교차되는 도시,/그 어느 주점에 들어/술을 마시고 있었다./나의 비극의 편력은 지금부터 시작된다./취기에 이즈러진 눈을 들고 바라보면/불행은 검은 하늘을 차고,/나의 청춘의 고독을 싣고/강물은 흘러간다./폐허의 도시 서울/아, 항구가 있는 부산/내가 갈 곳은 사실은 아무 데도 없었다./죽어간 사람들의 음성으로 강은 흘러가고/강물은 흘러가고,/먼 강 저쪽을 바라보며/나는 돌아갈 수 없는 옛날을 우는 것이다./옛날,/오, 그것은 나의 생애 위에 점 찍힌/치욕의 일월(日月)/아니면 허무의 지표, 그 위에/검은 망각의 꽃은 피리라./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나의 고뇌를 싣고/영원한 불멸의 그늘 그 피안으로/조용히 흘러가는 강.

**데모니시(dämonisch) : ‘귀신들린’이란 뜻으로, 사람의 내부에 있어서, 그 의지를 무시하고 어떤 행동으로 몰아대는 ‘초인간적인 힘’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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