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소크라테스 재판과 ‘정치 문해력’

조송원 승인 2024.02.04 23:46 의견 0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논거는 평균 수준의 유권자와 단 5분간의 대화이다.”(The best argument against democracy is a five-minute conversation with the average voter.) -윈스턴 처칠(1874~1965)-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았다. 아마 민주정에 대해 악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당시 아테네는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함으로써 몰락해 가고 있었다. 과도정치를 거쳐 민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당시 아테네 사회의 주류세력은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과 친밀하지 못했고, 항상 그들과 거리를 유지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묻고 따지는 대화법으로 ‘모른다는 사실도 모름’을 환기시키는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더구나 많은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사회주류 세력들은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끌어들이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재판에 부쳤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500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재판이었다.

280(유죄) 대 220(무죄)으로 유죄평결을 하고, 360(찬성) 대 140(반대)으로 형량은 사형이었다.

플라톤은 ‘어리석은 다수가 이끄는 정치’, 곧 중우정치(衆愚政治)의 실체를 스승의 사형 평결로 확인했다. 정체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인 민주정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중우정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정체 모델에서는 제외시켰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와 플라톤(기원전 427년 경~347년 경)보다 약 50~100년 앞선 시기의 아리스티데스(기원전 530~468)의 이야기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살펴보자.

「유권자들이 패각(貝殼·조개껍데기)에 이름을 써넣고 있는데, 글자도 모르고 누추하게 생긴 어떤 사람이 아리스티데스에게 패각을 내밀며, 거기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지금 자기가 부탁하는 사람이 아리스티데스가 아니라, 그저 허름한 시민인 줄 안 것이다.

이에 놀란 아리스티데스가 그에게 물었다. “아리스티데스가 당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했나요?”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정한 사람’이라고 하니, 나도 이제 진절머리가 나서요!”

이 말을 들은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패각에 자기 이름을 써 건네주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아리스티데스-

우리는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정치제도인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ostracism)에 대해 알고 있다.

(패각추방제라고도 한다. 도편(陶片)은 ‘도자기 쪼가리’이고, 패각은 조개껍데기이다. 추방할 사람의 이름을 쓸 종이 대용으로 도자기 파편을 사용했느냐, 조개껍데기를 사용했느냐의 문제이다. 그리스어 원어로 추정하면, 도편이 옳을 듯하다. 그렇지만 이 글의 저본인 신복용 옮김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패각’이라 썼기에, 저본의 내용을 참고할 때는 ‘패각’을 사용한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가 또 다른 참주정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고안한 제도라고 알려져 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주민소환제나 탄핵제도와 비슷하다. 그러나 제도나 입법의 취지와 실제 운용은 다르다.

참주나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경우도 많았다. 2020년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위성정당의 출현으로 그 취지가 무색하게 된 경우와 같다.

「패각 추방의 일반적인 진행 절차는 이렇다. 모든 유권자는 패각을 가져와, 그가 추방하고자 하는 시민의 이름을 거기에 써넣은 다음, 나무 울타리 안에 던진다. 집정관은 먼저 패각의 총수(總數)를 세는데, 모두 합쳐 6천 개가 넘지 않으면 투표는 무효가 된다.

그런 다음 이름대로 분류하여, 그 가운데 가장 많은 패각을 받은 사람이 추방된다. 그는 추방 기간 동안 국내에 남겨 둔 재산에서 얻는 수익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

본디 패각 추방은 어떤 정치인의 비리를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민중의 뜻을 억압하는 데 권력을 쓸 경우에 이를 억제하려고 만든 법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인간의 질투심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법이었다. 당사자가 재기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않고, 10년 동안만 해외로 추방하는 이 법안은 남을 해코지하려는 욕망을 적당히 사그라뜨렸다.

세월이 지나자 이 법은 정치판에서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을 몰아내는 데 적용되다가, (기원전 417년에) 히페르볼로스를 끝으로 사라졌다.

히페르볼로스가 패각 추방을 겪은 연유는 다음과 같다. 이 무렵에는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가 정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화목하지 않아 민중은 패각 투표를 실시하여 두 사람 가운데 하나를 나라 밖으로 추방하기로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연합 전선을 만들어, 히페르볼로스를 희생양으로 삼아 추방했다. 이렇게 되자 민중은 패각 추방이 타락하고 남용된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이를 없애버렸다.」 -앞의 책/아리스티데스-

아리스티데스는 별명이 ‘공정한 사람’일 정도로 누구든 공정하게 대했다. 사심 없고 능력 있는 정치가였다. 그러나 대중의 시기심과 질투심은 ‘공정하기 때문에’ 그를 도편 추방했다. 하물며 이익을 추구하거나 힘 있는 자에 대한 ‘선망적 동일시’가 만연한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문자 문맹에서 벗어나기보다 ‘정치 문맹’에서 벗어나기가 더 힘들다. ‘나의 이익’에 더해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리에 임명된 후 "V" 사인을 보이는 처칠 [위키피디아]

윈스턴 처칠은 보통의 유권자와 대화를 해보니, 대중은 공동선에는 관심이 없고, ‘나의 이익’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따라서 대중들이 ‘정치적 문해력’을 갖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고 경종을 울린 것이다.

따라서 처칠은 민주정은 최악의 정부 형태라는 말이 있음을 강조한다. 단, 조건을 붙였다. 역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필가답다. 그 조건은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하면’이다.(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e others that have been tried.)

민주주의는 결함이 많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치제도란 사실 또한 분명하다. 완벽한 정치제도는 존재할 수 없다. 공동체 구성원의 이익과 욕망이 서도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으로 보건대, 깨지기 쉬운 그릇일망정 민주주의야말로, 시행과 착오를 거치면서 인류가 발전시켜 온, 지금까지는 최상의 정치 문법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성패는 대중의 ‘정치 문해력’에 달려 있다. 어떻게 이 능력을 제고할 것인가?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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