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악악지신(諤諤之臣)과 정의 추구의 역사

조송원 승인 2024.02.01 13:18 | 최종 수정 2024.02.01 13:22 의견 0

#1. “저도 전문가이기는 합니다만, 입시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께) 제가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입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023년 6월 19일 당정협의에서 한 발언이다.

이에 대해 유승민 전 의원은, “대통령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대통령이 잘못해도 아무도 찍소릴 못한다. 그렇게 하면 공천 받는 데 유리하고, 장관직을 연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몰라도, 대통령이 잘못 가고 있는 걸 말리지 못하고, 그 실수를 자기가 덮어줘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하는지는 몰라도 너무 심한 것 같다.”고 논평했다.

“장관님들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셔서.” 1월 15 열린 이른바 ‘민생토론회’ 세 번째 시간에 첫 토론자로 나선 이우경 에이에스엠엘(ASML) 코리아 사장이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이 토론회 서두에 16분에 걸쳐 한 발언으로 미뤄보면, 아마 뿌듯해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했다.

“데이터 센터를 건설하고 전기차 보급이 본격화되면, 고품질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요하고 원전은 필수”이며, “탈원전을 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 산업이라는 건 포기해야 한다.”

대선후보 시절 ‘RE100’(재생에너지 전기 100%)이 뭔지도 모르던 윤 대통령의 학습 지체 현상은 심각하다. 첨단산업에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러나 그 에너지 충당은 재생에너지여야 한다. 원전에 의존하면 첨단산업을 포기해야 한다.

원전으로 전력을 공급해 만드는 반도체는 해외에 팔 수가 없다. RE100에 따라 제품 생산에 드는 전력이 재생에너지여야만 애플, 구글, BMW 등 글로벌 기업에 반도체를 팔 수 있다. 삼성전자 등은 에너지 전환이 늦어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통령의 무지가 첨단산업을 망치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출신의 과기부 장관 이종호는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의 침묵은 뭘 의미하는 것인가?

#2. 조간자(趙簡子)의 신하로 주사(周舍)라는 자가 있었는데, 사흘 밤낮을 간자의 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이에 간자가 물어 보았다. “그대는 무슨 일로 과인을 만나고자 하는가?” 주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악지신(諤諤之臣)이 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묵필(墨筆)과 독(牘·종이)을 들고 임금을 따라다니며, 잘못이 있으면 이를 기록할 것입니다. 날마다 기록하고 달마다 그 성과를 적으며, 해마다 그 효과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에 간자가 궁에 있을 때나 외출할 때나 그는 항상 곁에 따르면서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주사가 그만 죽고 말았다. 간자는 마치 아들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그 뒤 간자는 홍파(洪波)의 누대에서 여러 대부들과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간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에 대부들은 놀라, “저희 신하들이 죄가 있었는데, 이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 말에 간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대부들은 죄가 없소. 지난 날 내게 주사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해 주었지요. ‘양가죽 천 장이 여우 겨드랑이 털 하나만 못하고, 옳소 옳소 하는 많은 무리가 하나의 악악지신만 못하다.

옛날 상(商)나라의 주(紂)는 말없이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망하였고, 무왕(武王)은 악악하는 신하들로 인해 흥성하였다‘라고 말이오. 지금 주사가 죽은 후로부터 내 아직 나의 잘못을 들춰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소. 내 망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소. 이 때문에 과인이 우는 것이오.” -한시외전/악악대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

지도자의 주위에 충신이 모이느냐, 간신이 모이느냐는 지도자의 품성에 달렸다. 현명한 지도자 곁에는 쓴 직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고, 무지한 지도자에게는 아부에 탁월한 간신 무리만 꾄다. 망함과 흥함, 그 누구의 탓인가?

사람의 본성은 20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익이 한쪽 눈에 들어오면, 올바름(정의)에는 다른 쪽 눈을 감는다. 개인을 위해서나, 특히 공동체를 위해서는 이익보다는 올바름이 더 선의 총량을 증가시킴을 플라톤은 통찰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현실에서 증명해 보여준단 말인가.

대니얼 카너먼(1934~.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은 행복(happiness)과 만족(satisfaction)을 구분하다. 행복은 순간적인 경험이며 곧 사라지는 감정이다. 반면에 만족은 ‘지속적인 행복 상태’이다. 곧,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바라는 종류의 삶을 향해 노력하며, 삶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감정이다.

문제는 일반 사람들은 ‘행복’도 얻기 어려운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그 행복이라도 얻고 싶다’. 그러니 이익이 눈에 들어올 뿐, 올바름은 관심 밖이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만족 곧 지속적인 행복의 상태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다.

지금 이 순간 윤 대통령이나 김건희의 감정상태를 추찰해 보라. 그 순간적 행복들이 정녕 전체의 삶에서 긍정적 역할을 할까, 부정적 역할을 할까. 어쩜 순간적 행복을 탐하는 이런 어리석음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조건일 터이다.

하여 플라톤은 ‘영혼 불사’와 ‘사후 보상’이라는 프레임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만,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종교와 철학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플라톤은 종교적 차원과 철학적 차원이 구별되지 않던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플라톤을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기실 따지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세상은 엘리트주의가 근간이었다. 시대가 진전함에 따라, 신분이 ‘경제력’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1인1표’이지만, 경제적으로는 ‘1원1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이 장땡인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엘리트주의를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2000여 년 전 플라톤 시대에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음 저기’서 정의의 근거를 가져왔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지혜도 발전해 왔다. 지금, 여기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상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고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 썼다. 이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지만, 나는 이 연구를 마치며 다음과 같이 다시 정식화하고 싶다.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의 추구의 역사였을 뿐이라고. 달리 말해, 역사에서는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중요하다. 사회적 위치가 제아무리 중요해도, 이것만으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이론, 소유에 대한 이론, 경계에 대한 이론, 세금·교육·임금·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을 벼리기가 충분치 않다.

그런데 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으면, 정치적 실험과 사회적 학습을 통한 명료한 전략이 없으면, 투쟁은 잘 정의된 정치적 돌파구를 갖지 못한다. 그럴 때는 권력을 장악한 뒤, 전복시키려 했던 것보다 외려 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구성물로 이어질 수 있다.」 -토마 피케티/『자본과 이데올로기』/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의 추구로서의 역사-

조송원 작가

결국 정의, 좁게는 경제적 정의도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구성물의 결과이다.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 정치의 중심은 대통령과 국회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의해 경제적·사회적 정의의 개념이 달라진다.

어떤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나의 정의 개념’과 맞아떨어질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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