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22)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30)

이득수 승인 2024.04.03 07:00 의견 0

“아이는 당신이 원하지 않았잖아?”

“뭐 원하지 않았다고? 형편이 안 돼서 그렇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더더욱 사내를 받아들이면 누구나 그 사내를 닮은 분신을 낳고 싶은 법이지.”

하면서 또 한참이나 말이 끊어지는 게 가슴을 진정시키는 모양이었다. 뜻밖의 이야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열찬씨가 다시 술병의 마개를 열어 병째로 들이키는데

“잘 들어봐! 이 원수 같은 사내야. 미안하다는 말로 제발 이야기를 끊지 말고!”

하면서 중간, 중간 흐느끼는 바람에 열찬씨의 눈앞에 줄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4. 송도와 진주여자(30)

싸늘한 해운대의 바다바람 속에서 뜻밖의 이별통보를 받고 맥이 풀려 중남으로 돌아온 옥자씨는 만사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밥맛도 없고 옷차림이나 화장도 신경 쓰지 않아 늘 부스스한 모습을 보고 결핵관리 유여사가

“정양, 얼굴이 와 그렇노? 열찬씨와 무슨 일 있나?”

묻는 것을 신호로 면사무소의 직원은 물론 작하마을의 아주머니들 사이에 진주처녀가 대학생이 된 한 살 어린 면사무소의 이주사한테 마침내 버림을 받았다고 마치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그런데 기가 찬 것은 가뜩이나 심란한 옥자씨를 바라보는 면직원들과 면사무소를 출입하는 군청직원이나 파출소, 농촌지도소직원들의 눈빛까지 호기심이라고 보기에는 뭐한 기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심지어 마흔이 가깝거나 넘은 유부남들이 실없는 농담을 걸며 슬쩍슬쩍 찔러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유여사를 통하여 자신을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이순철씨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어쩌다 평리마을에 출장을 가면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만 연로한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나 싶어 사탕이나 과일을 사다주고 어깨도 한참을 주물러주고 나왔지만 봉당골 사외이 갓을 지나면 어느 가을날 열찬씨와 둘이 철조망을 넘어가 리기다소나무의 속잎이 노랗게 깔린 무덤가에 바바리코트를 벗어 걸고 산새들에게조차 민망한 시간을 보낸 일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울주군보건소로 직장을 옮겨도 동료들의 눈길이 묘하기는 여전한 것이 소문의 꼬리표는 어김없이 새 직장으로 따라온 모양 같았다. 겨우 새 직장의 분위기에 녹아들 무렵 옥자씨의 몸이 이상했다. 식욕이 떨어지고 자주 메스껍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 불안한 예감처럼 어김없이 생리가 끊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두 달째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당연히 장본인인 열찬싸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어쩔 것이냐, 책임을 져야 될 것이 아닌가 따져야 마땅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휴학을 하고 신춘문예도 두 번이나 떨어지고 만사에 자신을 잃어 이미 술에 젖어 폐인이 비슷한 사람, 도무지 뭘 어째야 될지 모르겠다며 다시 마음을 잡고 복학을 하고 군에 다녀와 자리를 잡으려면 서른이 넘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까지 자신보다 한 살이나 많은 여자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다던 사람, 당장 결혼이라도 하자고 하고 싶어도 피차 방 한 칸 얻을 입장이 안 되기도 하지만 아직 단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보지도 않은 입장에 괜히 더 큰 말썽만 불러올 것 같았다.

거기다 스물두 살의 간호사가 자기보다 한 살 어린 스물한 살의 사내에게 아이까지 가진 채 배신을 당했다는 무슨 신파극 같은 소문이 돌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니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하동 옥종면의 큰 오빠집이 떠올랐지만 자주 만나지도 않는 처지에 다 자란 여동생이 혼전에 배가 불러서 그것도 자기보다 어린 남자에게 버림까지 받아서 찾아간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어는 토요일 날 중남의 전에 살던 집의 아주머니를 만나러 찾아가는데 언양차부에서 버스를 타고 덕천고개 여상 앞을 지날 때부터 흐르던 눈물이 중남차부에 내려 열찬씨가 터덜거리며 걸어오던 골목길을 거쳐 삽짝 문을 여는 순간 맞은 편 돌담, 쿵 소리를 내며 저녁마다 담을 넘어오던 그 이끼 낀 돌담을 보는 순간 그만 억장이 무너져 삽짝 문을 잡고 한참이나 섰는데

“아이고, 이기 누고 전양아이가?”

인기척을 느낀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더니

“아이구, 얼굴이 와 이 모양이고? 아주 반 쪼가리가 되었네."

하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다 왝, 하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옥자씨를 보고

“아이구, 처녀가 웬 깨악질이고? 니 얼라 섰구나?”

하다 금방 입을 다물고

“안 되겠다. 작은 방에 가자. 쪼매 있다가 아저씨 오면 난리버꾸통이 나겠다.”

하며 옥수씨가 2년이나 살았던 방으로 안내하고 우선 담요를 들고 와

“발이라도 좀 덮고 벽에 기대라. 입덧이 심한가 베.”

하자

“아줌마!”

하고 마침내 옥자씨가 와아 울음을 터뜨렸다. 임신을 하고 처음으로 임신사실을 말한 것이었고 누군가가 임신한 자신을 처음으로 돌봐 준 것이었다.

“그래 울지만 말고 마음을 잘 추스르고 한 숨 자! 내 전양 좋아하는 동 김치 상글어서 저녁밥 차려올 게.”

하고 한참 만에 상을 들고 들어와

“아무 소리 말고 부지런히 무라. 지금 많이 무야 아아도 어른도 다 튼튼하지.”

하면서

“배추김치는 상글어서 묵는 것 보다 이래 째서 묵는 기 지 맛이지.”

하면서 김치를 찢어 억지로 몇 숟갈 뜨게 하고는

“그래, 이주사 하고는 연락이 되나? 소문에는 둘이 헤어졌다고 하던데.”

“...”

“이거 큰 일 났네. 그 나 어린 사람이 무얼 책임지기도 그렇고. 소문에는 돈이 없어 휴학을 했다고 하던데. 버든의 본가도 형편이 말이 아니고.”

하다 훅, 또 울음을 터뜨리는 옥수씨의 어깨를 두드려주다

“울지 마라. 여자팔자 다 그렇지 뭐. 남자 하나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고...”

하고 또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에 젖는데

“아줌마, 나는 어쩌면 좋아?”

눈물이 그렁그렁해 묻는 옥자씨에게

“가만 있거라. 나도 우째야 될지 통 갈피를 잡을 수 없네.”

하다가 밖에 인기척이 들리자

“우리 집 양반 왔는갑다. 내 저녁 차려주고 아저씨 잠들면 올께. 그 때까지 잠이나 한숨 푹 자라.”

하고 건너갔다. 굳이 잠이 들려고 하니 오히려 잠은 오지 않고 온갖 잡념, 별 요망한 생각이 다 들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봉당골의 무덤가와 옥철이와 함께 갔던 작천정과 언양장터가 떠오르고 열찬씨의 다락방이 있던 초량6동의 달동네로 가는 골목길과 해운대와 광안리의 바람도 거센 바닷가와 모래먼지, 좁고 음습하던 여인숙과 술이 취해 비몽사몽간에 벌어진 방사가 떠올랐다. 그간 통 접촉이 없다 이별을 앞둔 바로 그 밤에 아이가 들어선 모양이었다.

하릴없이 벽에 귀를 대고 옆방에 숟가락서 달그락거리며 저녁을 먹고 후후 불어 숭늉을 마시는 소리까지 가늠을 하고 하마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자리를 펴 준 아주머니가 아저씨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건너올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는데

“...?”

돌연 이상한 소리와 함께 이불이 들썩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는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씨익 웃으며 한참을 기다리자

“많이 늦었제?”

하던 아줌마가 슬쩍 옥수씨의 미간에 스쳐가는 웃음기를 보고

“무슨 소리 들리더나? 문디 같은 인간이 하던 지랄도 덕시기 깔아놓으면 안 한다고 하더니 평생 잘 안 하던 짓을 하필 오늘 벌이다니.”

하며 민망해하다

“시방 전양 니가 웃음이 나올 형편이가?”

하며 눈을 흘기더니

“내 한참이나 생각을 해도 대책이 없다가 마침내 생각이 났다. 아까 아아아부지 밑에서 들숨날숨하다가 문득 번개처럼 생각이 났는데 그래 아무리 죽네사네 하는 사이라도 사나아 관심이 떨어지고 한번 돌아서면 끝이다. 여자가 상처를 받든 아이를 갖든 남자는 한번 떠나버리면 끝이란다. 이 꽃 저 꽃 찾아다니는 나비처럼 세상은 넓고 여자는 얼마든지 깔려 있으니까.”

“...”

“나도 여잔데, 비록 딸은 못 놓고 아들만 셋이지만 그래도 딸 같은 니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맞다. 아니 지금은 가주사 그 사람이 사람도 좋고 머리도 좋고 하지만 형편이 그러니 아예 나무 축에도 못 든다. 그만 잊아뿌라.”

“...”

“내일 내캉 부산의 병원에 가자. 일요일에도 산부인과는 한다 카더라.”

“...”

그렇게 이튿날 버스종점인 충무동의 한 산부인과의 싸늘한 철침대에서 수술을 받고 한참이나 회복실에 누운 옥자씨의 손을 꼭 잡아주며

“한 바탕 꿈이라고 생각해라. 열찬씨 그 사람 자꾸 원망하면 서로 마음만 아프고. 그냥 살다보면 다 잊어지고 세월이 가다 보면 또 좋은 사람이 생길 거고 아이는 그 때 또 가지면 되고.”

울어 퉁퉁 부은 볼을 쓸어주며 혀를 끌끌 차더라는 것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단 소리 하지말라 캤제? 이 무책임한 인간아!”

“미안해! 나는 정말 몰랐다. 다 내 책임이다.”

“마, 시끄럽다. 인지 와서 뭐 우짤낀데?”

“...”

그러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내가 내일이라도 당장 부산에 내려갈 테니 각오 단단히 하소. 홍 여사한테도 내가 먼저 만나 먼저 아이를 가진 여자니 인자 양보를 하라고 하고.”

“...”

“자기는 그 동안 자식 낳고 손자 보고 재미있게 안 살았나?”

“미, 미안해.”

“또 그 소리.”

“...”

집에 돌아와 거실에 누웠는데 천장의 꽃 무니가 뱅글뱅글 돌았다. 하필이면 가로세로 방사선까지 일정한 무니라 눈앞이 더 어지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내쉬는 한숨소리에 안방 침대에서 자던 영순씨가 눈을 비비고 나오며

“와? 어제 보고가 잘못 되었나? 우째 그래 잠도 못 자고 한숨을 쉬노? 김모청장 그 인간하고 헤어지고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 또 잠꼬대를 하고 난리네. 그러니까 내가 다 늙어서 일 욕심, 돈 욕심내지 말라고 했잖아?”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무슨 위기가 닥친 지도 모르고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남편을 다독였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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