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24)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32)

이득수 승인 2024.04.09 08:00 의견 0

“당신이라니? 오늘은 자꾸 당신이라고 부르네.”

“그래요. 이제 사랑하는 당신이지. 서로 핏대를 올려 삿대질을 하는 사이. <이봐, 당신<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여보당신>의 당신이야.”

“앞으로는 절대로 당신을 괴롭히지 않고 비록 같이 있지는 않아도 우리가 처음 밤을 보냈을 때처럼 잘 할게.”

“미, 미안해.”

“괜찮아요. 어서 들어가서 자요. 나도 눈을 좀 붙이게.”

“고마워.”

14. 송도와 진주여자(32)

신통하게 그날이후로는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자책을 하는 일도 없이

“당신 오늘은 뭐 해? 나는 종일 우리 여보 생각했다.”

하고 마치 신혼시절 새색시처럼 나오다가

“어제 밤 꿈에서 당신이랑 잤어. 눈을 세모꼴을 만든 여보가 뒤에서 나를 껴안는 바람에...”

“옥자씨, 새삼 왜 이래? 사람 부끄럽게.”

“아니 뭐 어때서? 내가 남의 남편 뺏어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첫사랑, 아니 유일하게 살을 섞고 아이를 배게 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이.”

“최소한 당신이나 홍여사를 현실적으로 괴롭히진 않을 거야. 걱정 말아요.”

하다가

“어제는 당신을 부산에 만나러 가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새 옷을 한 벌 맞추고 여행가방도 사고 핸드백도 메이커로 사고 스카프도 화사한 걸로 하나 샀지요.”

하다

“이젠 당신하고 자도 피임 따위는 안 할 거야!”

완전히 몽상에 젖은 소녀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아무튼 한번은 서로 만나야지. 그리고 직접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지.”

“지기는 또 그런 말을 하네. 용서는 무슨 용서.”

“...”

덕분에 <송도해안볼레길 스토리텔링사업>은 다시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2,3일 혼자 구간별 스토리의 성격과 조화를 검토한 후에 다시 실무자토론회를 열었는데

“김 과장은 왜 안 오는가? 스토리구성에 별 이야기는 없었는가?”

둘만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묻자

“하늘 같은 선배님이 작성한 스토리를 감히 빼라 넣어라 할 입장이 아니라고 무조건 국장님이 제안하는 대로 찬성이랍니다.”

“그래. 그건 존경한다는 뜻 보다는 골치 아픈 일에서 슬그머니 빠진다는 말인데, 책임도 안지고.”

쓴웃음을 짓는 열찬씨에게 커피를 타주면서 창훈씨가

“저는 국장님의 스토리 하나하나가 다들 신통했는데 그걸 발췌해서 일부를 버린다는 것이 너무 아까워요.”

하는데

“왜 선택과 집중이란 말이 있지. 아무리 맛있는 생선이라도 비늘을 치고 배를 갈라 내장을 버리고 또 콩나물도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요리를 하듯이 말이야. 무엇이든 선별작업을 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혼란상태가 되지.”

하면서 목록을 펴고

“자, 제2구간 태고의 숲길은 송도묘박지를 건너 먼 바다를 드나드는 외항선과 송도어촌계의 어부들에게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기암절벽과 열대난대림을 선사하는 절경의 해안가와 숲, 그리고 나무와 숲 들꽃과 곤충과 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식생을 소개하는 코스인데 그러다 보니 스토리 수가 좀 많고 다소 중복된 점이 없잖아. 두 사람의 의견은?”

열찬씨의 물음에

“예. 2-7.<평범한 풀과 들꽃들>을 뺏으면 합니다. 이미 꽃과 나무에 대한 많은 스토리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정병진씨의 말에

“내 의도는 평범함 속의 비범함, 또는 왜소한 것들의 당당함이랄까 나름대로의 존재이유를 알리고자 함인데 그것도 좋지. 그럼 창훈씨는?”

“예 2-15. <가장 괴롭고 외로운 새 (붉은 머리 오목눈이와 황조롱이>를 <외톨이새 황조롱이로>로 축소했으면 합니다. 가장 외롭다는 새가 두 종류가 되는 것도 그렇고 또 2-14. <서구의 대표 새 (직박구리와 맷비둘기)>, 2-16.< 새들의 땅, 두도>등 새들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하니까요?”

“그래 그것도 좋겠군.”

“그리고 이건 단순한 기술적 문젠데 2-17. <국제수산물류무역단지> 2-18. <등 푸른 고등어, 서구의 상징>은 성격이 비슷하니 하나로 통합 숫자를 하나 줄이지요.”

“그래 정병진씨 말도 맞아.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이기보다 어떤 반성 같은 것이기도 한데 2-11. <소루쟁이와 미국자라공>, 2-12. <숲속의 미인 자귀나무>, 2-13. <방황하는 나무들(소나무와 참나무)>이 집필자의 기분에 사로잡힌 현학적, 쉽게 말해서 무얼 좀 아는 척 하는 느낌이 있어서 뺐으면 하는데.”

“숫자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겠지만 마지막 방황하는 나무 소나무와 참나무 이야기는 이상기온으로 숲이 차츰 점점 아열대화 되어 소나무가 점점 북쪽으로 밀려난다는 면밀한 관찰로 이루어진 참으로 의미심장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창훈씨가 못내 아쉬워하자

“그럼 그건 일단 보류해서 나중에 재조정하기로 하고 또 다른 의견은?”

하자

“국장님.”

아주 조심스런 표정의 창훈씨가

“이건 제가 이번에 본 국장님의 스토리텔링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슴에 와 닿는 좋은 글인데 말입니다.”

하면서 자료를 뒤적여

“ 2-21.희망정(希望亭)에서 전망 찾기 말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지요.”

하고는

“여러분, 늘 평지만 걷다 비로소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니 숨이 가쁘십니까? 이곳이 암남공원에서 제일 높은 진정산정상입니다만 높이가 해발 132M정도이니 영도다리 옆에 새로 짓는 롯데백화점보다도 낮을 것입니다.

이 사방이 탁 트인 산꼭대기에 고운 처녀가 땋은 머리채처럼 날렵하게 자리 잡은 정자의 이름이 희망정입니다. 무슨 의미, 무슨 희망을 꿈꾸며 희망정이라 지었는지 궁금하시죠? 그것은 2009년 공공근로사업이 첨 생겨 하루아침에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의 절망을 딛고 희망근로로 이 정자를 짓게 되었다고 희망정이라고 지었답니다. 느낌도 그럴 듯하지만 당시의 어려운 사정에도 꿋꿋이 버텨온 희망근로자들은 지금도 저 희망정이 자신의 손으로 지었다는 긍지를 느끼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겠지요.

자, 시원하게 트인 앞바다를 한번 조망해보세요. 먼저 영도봉래산을 배경으로 푸른 바다에 점점이 있는 묘박지의 배들이 보이시죠. 그 배들의 뒤쪽으로 조금 크고 통통한 모양은 배가 아니고 태종대앞의 주전자섬이랍니다. 다음 정남향으로 길쭉하게 가로놓인 나무섬이 보이시죠. 바다낚시로 유명한 섬입니다. 그 옆에 작은 점 두 개는 무엇일까요. 바로 형제섬입니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는 다대포 몰운대를 지나 낙동강하구와 명지, 녹산이 보이며 자세히 보면 멀리 가덕도 연대봉도 보이실 것입니다.

다음 발 아래로 눈을 돌려보시죠. 철새들의 낙원인 두도가 보이고 시루떡바위로 불리는 적갈색의 해안단애와 푸른 솔숲이 보이시죠. 동섬의 이마부분과 암남공원해안단애에 보이는 저 초록빛 활엽수림은 모두 해안난대림입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대단히 활기찬 숲이지요.

정자 밑을 잠깐보세요. 암남공원에서 보기 드문 자그마한 평지에 민들레, 닭의장풀, 칡, 여뀌, 억새, 솔쇠, 개솔쇠, 박하, 바다국화, 미나리아재비, 소루쟁이, 며느리배꼽풀 등 온갖 야생화가 무성하지요. 외래종인 미국자라공과 달맞이꽃도 보이군요. 저 앞쪽 왕고들빼기 꽃에 앉은 갈색점이 찍힌 회색의 작은 나비가 보이시죠. 한참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벌과 말벌을 흉내 내는 등애도 보이고 가을철에는 하늘높이 잠자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비록 한 철밖에 살 수없는 곤충이나 한 해밖에 살 수없는 일년초들, 그중에 벌써 홀씨를 다 날려 보낸 민들레까지 제각각 바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며느리배꼽풀의 덩굴 속에는 하루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가 바쁘게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모두 활기에 차고 희망에 차 있지요. 여기가 바로 희망정이니까요.”

정병진 계장의 눈길도 무시하고 끝까지 읽고 나서

“우리 국장님의 따뜻한 마음과 번득이는 혜안이 투영된 훌륭한 스토리로 제가 가장 탄복한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스토리텔링보다는 한 편의 수필,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격려문 같은 느낌이 있어서 말입니다.”

“야, 우리 창훈씨 보통내기가 아닌데? 내가 찜찜하게 생각하던 부분을 귀신처럼 잡아내내. 자 제 2구간은 절경과 숲과 꽃 새들의 이야기가 풍부한 만큼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세.”

하고 제 3구간으로 넘어갔다.

“다음 제 3 구간 아홉 구비 길은 비록 거리는 짧은 구간이지만 구불구불 아홉 구비의 길처럼 각각 특징이 뚜렷한 3-1.<국립수의과학원(혈청소)>와 3-2.<모지포고개>, 3-3. <빗살무늬토기와 숫돌(암남동 패총1)>, <3-4. 일만 년 전의 가을날 (암남동 패총2)> 또 <3-5.동백꽃과 동박새>와 3-6.<칡넝쿨과 등나무>, 3-7. <기다리는 마음 (김민부 시비)>, 3-8.<뉴질랜드 참전기념비>처럼 내용도 다채롭고 집필자로서 가장 정성과 창의성이 많이 들어간 구간이지. 또 3-9. <숭어잡이 망바위-문바위골 숭어들이 이야기>, 3-10.<대마도를 보여드립니다.>, 3-11.<장군산의 유래>, 3-12.<송도의 야경>은 물론 마지막 3-13.<골목과 계단과 연두색 쪽문>도 희소성과 특별함이 두드러진 스토리텔링이지. 그래도 두세 개는 어차피 줄여야 할 텐 데 두 사람의 의견은?”

하자 정병진씨가

방금 전에 국장님한테 배운 솜씬데 우선 3-1.<국립수의과학원(혈청소)>와 3-2.<모지포고개>를 하나로 묶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감탄하고 자신 있는 부분이 3-3. 6.<빗살무늬토기와 숫돌(암남동 패총1)>, <3-4. 일만 년 전의 가을날 (암남동 패총2)>인데 특히 일만 년 전의 가을날의 상상력이 가득한 원시인들의 생활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빼어난 스토리, 국장님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난 명품입니다. 어떤 경우가 있어도 이 두 편은 빼면 안 되겠다는 이야깁니다.”

“이런 싱거운 사람을 보았나? 초상집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뺄 것만 이야기 하라니까 그러네.”

“예. 3-6.<칡넝쿨과 등나무>는 갈등(葛藤)에 대한 명쾌한 해설이기는 한데 볼레길의 주제와는 조금 떨어지나 제외하기로 하고 말입니다. 3-7. <기다리는 마음 (김민부 시비)>, 3-9. <숭어잡이 망바위-문바위골 숭어들이 이야기>, 3-10.<대마도를 보여드립니다.>는 하나같이 그 내용이 신선하고 누가 보아도 재미있는 내용인데 3-8.<뉴질랜드 참전기념비>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아직 현직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이야기가 아무 여과 없이 바로 기록된 것이라서 말입니다.”

정병진씨가 이의를 제기하는데

“왜? 당시의 담당과장인 나와 담당자인 우리 정계장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주 리얼한 이야긴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 잔뜩 긴장했다 문득 웃음이 터지는 휴게실 같은 지면이잖아? 좌우간 창훈씨가 한번 읽어보지.” 하고.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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