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27)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35)

이득수 승인 2024.04.12 08:00 의견 0

정병진씨가 난감한 표정를 지어

“할 수 없지. 그 박동장에겐 절대로 내색하지 말고 미리 작성을 해두었다가 아이디어나 제안을 모집하면 재빨리 제출해버리게. 만약에 2중으로 다툼이 생기면 내가 자네들한테 줄 것으로 증언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은 창훈씨 혼자 올라와 나와 스크랩사진에 대해서 의논 좀 하세.”

“예.”

14. 송도와 진주여자(35)

비로소 한 건이 끝난 홀가분한 기분에 그날 저녁 전화를 하는데

“여보, 어제는 내가 너무 황당했지? 내가 왜 그랬는지 전화를 끊고 내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후회막급이야.”

“아니야. 난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아. 그 모든 게 다 내가 잘못한 때문이고 당신은 그럴 수도 있을 것도 같아.”

“또 내 잘못과 미안해 네. 그러지 말고 남자답게 ‘사랑해!’라고 한번 말해주면 안 될까?”

“아이구, 부끄러워라. 새삼스럽게 사랑은 무슨 사랑?”

하다 앗차! 싶어서

“당연히 그래야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또 이미 처자식이 있는 내가 할 말도 아니고...”

“에이, 또 그 소리.”

하면서도 다음부터는 아주 정숙한 요조숙녀(窈窕淑女)로 나오겠다며 껄껄 웃고 일찍 통화를 마쳤다.

다행히 한 동안 더는 옥수씨의 통화가 위험수위를 넘지 않는 가운데 한 발 한 발 차분하게 연말의 마무리를 향해갔다. 아무래도 종현씨가 촬영한 사진만으로는 부족해 이 한겨울에 어떻게 야외촬영을 할까 고민하는데 하루는 박창훈씨가 빙글빙글 웃으며

“국장님, 저도 국장님처럼 지금까지는 백과사전을 뒤져 동식물의 모습을 스크랩하면서 왜 인터넷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부족한 사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바로 스토리에 퍼오면 되는 것인데요. 또 편집도 출판사에 가면 전문가가 바로 인터넷의 그림을 따와 적당한 배열로 다 해결을 해줄 것입니다.”

해서 현직 때 부터 믿고 거래하던 동문인쇄소의 아주 성실한 김병순사장에게 전화를 하자 오랜만이라면서 반색을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국장님의 얼굴부터 보고 싶다고 했다. 사장과 차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창훈씨와 출판사직원이 그새 친해져서

“국장님, 이 사진 어때요?”

외톨이 황조롱이와 동백꽃과 동박새를 검색해 제시했다.

“멋지네. 그렇게 가 편집을 해서 나중에 같이 보도록 하지.”

드디어 과업의 마무리가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어느 듯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정병진계장을 비롯한 구청의 간부들이 의회의 예산안심의와 마지막 정례회의 참석하는 사이 열찬씨와 창훈씨는 동문인쇄소에 이틀간을 출근하며 <송도해안볼레길 스토리텔링>의 최종안을 완성했다. 최종 확정된 48개 모든 스토리에 꽃이나 새, 곤충들의 사진이 첨가되자 스토리 하나하나가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사한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멋진데요. 국장님, 저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이렇게 산뜻한 결과물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아무 기초상식도 없이 그냥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았는데 선생님이 그 뜬 구름으로 아침이슬도 만들고 안개도 만들고 무지개도 만들었어요.”

“야, 우리아들 언제는 아버지고 언제는 선생님이야?”

“아이구, 죄송합니다. 오늘은 그냥 집필자선생님이란 생각이 들었는가 봅니다.”

“그래. 수고했어. 그런데 사실은 지금부터가 중요해.”

“지금부터라니요?”

“옛 말에 몸이 천 냥이면 군이 구백 냥이라고 하듯이 어쩌면 48개 전체스토리보다 표지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어떤 표지로 독자의 관심을 이끌어내어 이 스토리들을 읽어보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그러니까 남의 눈을 끄는 산뜻한 표지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단 말이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선생님의 구상은 요?”

“내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우리가 찾아낸 삽화 중에 가장 아름답고 독특하며 남의 눈을 끌 만한 것, 절경과 풍물도 좋겠지만 주로 동식물의 사진을 여럿 묶어 표지를 구성했으면 하네. 그리고 책의 제목도 그냥 <송도해안볼레길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좀 약하잖아? 그 볼레길을 좀더 구체적이고 확연하게 표현하여 독자의 관심을 끌만한 중신아비, 그러니까 촉매가 되는 수식어 구절을 찾아내어야지.”

“예.”

“아들아, 니는 출판사에 가서 출판사직원하고 표지를 디자인하는데 우선 전체를 아래위로 3등분을 하고 가운데 부분에 들어갈 삽화들을 모아 배열해보게. 내 생각으로는 열 건 전후가 되면 좋을 것 같네.”

“예.”

“그 사이에 나는 아까 이야기한 책표지의 수식어를 구상해보도록 하지. 그 수식어와 책이름이 표지의 윗부분 1/3을 차지하는 거지.”

“그럼 아랫부분은 요?”

“부산광역시 서구라고 발행처표시를 하되 서구 마크와 슬로건 살고 싶은 행복도시를 삽입해야지. 그러니까 녹, 백, 청색으로 이루어진 구 마크 뒤에 작은 글씨로 살고 싶은 행복도시를 넣고 그 아래로 부산광역시 서구를 크게 표시하면 되겠지. 단 표지의 그림이 죽지 않게 상당한 여백을 두고 아주 작은 글씨로 말이야.”

“예.”

하고 창훈씨가 나가자 열찬씨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10 자 내외의 짧은 수식어로 책자의 내용을 압축하고 주민들의 관심을 유발해야 되는 거지만 무엇보다도 민선시대의 오너 현직구청장의 긍정적 반응을 끌어내어야 하는 것이었다. 타이틀이나 책표지, 구체적 내용도 중요하지만 우선 표지를 쓰윽 한 번 훑어보고 책장을 드르륵 넘겨본 뒤 조심스럽게 자신의 인사문이 어디쯤 있는지 내용은 얼마나 자기마음과 맞는지 또 사진이나 이름은 실렸는지 살피고 마지막 직업적인 습관대로 발행처표시를 살필 것이었다.

1년에 구청장의 사진이나 이름을 넣을 수 있는 발간물의 횟수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연말인 현시점으로 보아 어쩌면 이름이나 사진을 넣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떻게든 구청장이 만족할 만한 개인적인 홍보의 실마리를 삽입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그래도 그 책자를 읽은 사람들이

(야, 우리 아무개구청장이 또 힘든 일을 해냈네. 그 양반 보기보다 참 일을 잘 한단 말이야.)

하는 말이 나오도록, 아니 구청장이 그렇게 기대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끙끙거리며 생각에 잠기다 전화를 걸어

“창훈씨의 일은 잘 되어가나?”

“예. 가로로 다섯, 세로로 셋 총 15개의 삽화를 넣는 것이 전문디자인의 황금비율에 맞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15개의 삽화를 고르고 있습니다.”

“그래 그 삽화들로 테마별로 잘 어울리게 배치하되 가로와 세로의 중심축에 가장 산뜻하고 관심을 끌만한 사진들을 배치하게.”

“나는 생각이 잘 안 나서. 송도현장을 둘러보든지 하고 내일 오후에 정계장이랑 셋이 만나 최종확정을 짓도록 하지.”

“예. 잘 알겠습니다.”

책상을 정리하고 나와 일부러 오른 쪽 숲으로 난 편백나무 힐링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마침 날씨가 포근해 정오의 햇살이 노랗게 내려앉은 나무그루에 앉아

“뭐하노? 밥은 묵었나?”

옥자씨에게 전화를 거니

“아니. 혼자 사는 여자가 뭐 점심 같은 거 일일이 챙겨 먹나? 있다가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든지.”

심드렁한 목소리로 보아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밍거적거리거나 영어책을 들여다보다 눈도 침침하고 하품도 나오는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저런? 아침은 먹었고?”

“아니, 뭐 간단히 커피 한 잔 했지.”

“그래. 남들은 연말이다 뭐다 또 김장이다 뭐다 하는데 김장김치는 담았어?”

“아니 같이 지내는 언니들이 한 통씩 주면 은석이하고 둘이 한 해 먹고도 남아.”

“그래? 요즘도 모든 반찬을 사다 먹나? 찌게는 끓일 줄 아나?”

“진짜 정곡을 찌르네. 나 아직 찌게를 끓여본 적이 없어. 찌게 끓여 바칠 사람도 없고”

“허허, 그것 참!”

“왜 또 ‘다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려고 그러지?”

“아니야. 그렇지만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으면 지금쯤 음식은 물론 집안살림에 도가 튼 남의 시어머니나 넉넉한 장모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또 그 소리. 연말에 가족들이랑 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

“아니. 양력설이라 각자 알아서 쉬는 거지. 그 보다...”

“그래 그 보다?”

“올 한 해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보니 서구청의 작은 책자 하나 집필해준 것 밖에는 별 성과가 없는데.”

“그런데?”

“옥수씨를 만난거지.”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꼭 만나야 될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충격이었어.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도 잡을 수 없고 그냥 죄스럽기도 하고.”

“난 그게 아니야. 난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해.”

“시작이라?”

“당신하고 제대로 이루어보지 못한 사랑, 남녀, 아니 부부의 정을 지금부터 풀어나가는 거지.”

“뭐, 부부의 정이라?”

“놀라지 마. 당장 짐 싸들고 찾아가 홍여사랑 이혼하고 나랑 살자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러나 내 마음엔 이제 마음이라도 내 남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기둥처럼 든든히 버텨주는 것 아냐?”

“그래. 현실적으로 난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는데.”

“물론 그렇지. 내가 뭘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만.”

“...”

기가 차서 한참이나 숨죽이고 있는데

“열찬씨, 듣고 있어요?”

“응, 듣고 있어. 계속 말해 봐.”

"왜 상상임신이란 말이 있듯이 상상남편을 좀 해주면 안 돼.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뒤에 따라오면, 왜 이래요? 저기 뒤에 따라오는 우리 아이아버지 보면 어쩔려고?, 할 수 있는 남편 말이요.”

“허허, 그것 참!”

“내 자존심이 상해서 이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지만 현실적 남편 그러니까 같이 살비비고 아이 낳고 사는 아내가 홍여사라면 나는 다음으로 마음으로 주고받는 정신적 아내가 되어야겠는데 그것도 아니더란 말이지. 나와 당신이 얼떨결에 같이 자는 처지가 되고나서도 당신은 잠꼬대에서 순영씨를 부르더니 당신이 낸 시집을 보니 당신은 아직도 그 사람을 못 잊고 있더구먼. 내 이름은 한군데도 안 나오고 오로지 순이, 순이, 순아, 순이야만 나오더군.”

“미안해. 당신생각만 떠오르면 바로 죄책감이 몰려오는데 어떻게 시를 쓰나?”

“저런?”

“당신은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아픈 기억의 여인이지. 내 젊음의 얼룩이랄까, 회한이랄까, 뼈아픈 후회, 되돌릴 수 없는 자책감 뭐 그런 이미지의 여인인데 내가 달리 무어라 말할 수 있겠어.”

“저런? 아파도 내가 많이 아팠지. 무책임한 사내들에겐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일지 모르지만 여자에겐 그게 상처가 넘어 족쇄가 되고 꼬리표가 되는 것이지. 영순씨가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아내라면 정신적, 영혼적, 아니 그냥 첫사랑의 여인은 내 몫이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순영씨 몫이고 난 도대체 뭐란 말이야? 뭐 아픈 기억속의 여자라고? 유행가에 나오는 내 마음의 여인조차도 될 수 없는 나는 무엇리란 말이야? 도대체...”

“...”

“그렇지만 그건 당신문제일 뿐, 나는 당신을 만난 그 자체가 중요해. 비로소 한 때나마 남자가 있었던 여자,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 그리고 지금도 그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여자가 된 것이지. 화석 같은 여자가 아니고 살아 숨 쉬는 여자로 말이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또 그 소리. 그래도 당신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니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네.”

“...”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해 내 할 말만 했나 봐. 그래 연말인데 몸은 좀 어때? 모임이지 뭐니 날마다 술을 먹고 속도 많이 쓰릴 텐데.”

“그래서 오늘 점심도 복국이나 먹으려고 해.”

“피이, 나는 직장 다닐 때 저만 밤새 술 마시고 점심때마다 복국집 찾는 남자들, 보건소장이나 과장들이 젤 싫더라. 술도 안마시고 복국도 좋아하지 않는 여직원들이 왜 같이 동행해서 잘못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복국을 날마다 먹어야 하는지.”

“...”

“이런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미안해요, 열찬씨. 당신 몸도 허할 텐데 보약이라도 한 재 짓게 내가 돈을 좀 보내면 안 될까?”

“무슨 소리? 평생 갚아도 못다 갚을 내게 돈은 무슨 돈?”

“꼭 그런 건 아니야.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옛날의 젊음도 없고 미모도 사라진 두루뭉술한 중년이 되어서 말이야. 딱 한 가지 여유 있는 것이 돈이니 돈이나 한 푼 보낼 수밖에.”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마음으로만 받을 께.”

“그래. 하는 수 없지. 배고플 텐데 어서 내려가서 식사하세요. 복국을 먹든, 떡국을 먹든.”

“알았어요. 당신도 끼니 거르지 말고.”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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