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뜻밖의 귀촌(13)
마침내 상량식 날이 닥쳐 성일씨가 축문을 읽고 인부를 비롯한 가족 20여 명이 하는데 현주씨는 물론 기연씨, 성일씨네 가족까지 참석해서 식사가 거의 끝난 뒤 기연씨와 유서방, 성일씨를 따로 소나무그늘로 불러내니
“아, 저는 뭐...”
유 서방이 주춤거리자 현주씨도 대신 따라왔다.
“우리 집 건축허가가 났으니 차례로 허가가 날 것이다. 도자기 집에서 길을 막아 도면상 길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 중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되 절대로 도자기집, 특히 여자와 말다툼을 하거나 싸우지 말도록. 이건 내가 경험으로 아는데 동네서 말썽내기 좋아해 관공서에 민원을 상습적으로 넣은 사람한테는 아무리 사리를 따져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고 자칫 말꼬리라도 잡히면 끝없는 시빗거리에 벗어나지를 못하고 특히 남자는 욱하는 성미에 큰 사고가 나기 쉽다. 거기다 저런 사람들은 그런 빌미가 생기기만 기다리고 있지. 그러니까 무조건 아무 내색도 않고 평상시처럼 무심하게 지나치는 거야. 알았지요?”
하고 일일이 다짐을 받았다.
아무래도 거름이 부족할 것 같아 박장로의 지인 중에 거름장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5톤 트럭 한 차를 35만원에 사 한 귀퉁이에 부려놓고 들깨모를 붓기 위해 땅을 고르는데 장화 발이 쭉쭉 빠지더니 마침내 꼼짝달싹 할 수 없도록 깊이 빠져버렸다. 삽자루를 의지사마 한참이나 끙끙거리며 겨우 한 발을 빼내는 데
“외삼촌, 와 그라능교?”
위쪽 정지작업장에 있던 또식씨가 내려와 발을 빼주다
“아이구야!”
화들짝 놀라며 껄껄 웃었다. 작업현장은 물론, 교회나 의용소방대까지 전천후로 신고 다니는 자줏빛 구두가 완전히 흙투성이가 된 것이었다.
“야야, 이걸 우짜면 좋노? 우선 도구나 좀 치면 물이 빠질까?”
“아임더. 이 정도라면 도구로는 안 되고 유공파이프를 묻어야 됩니더.”
“유공파이프라?”
“예. 구멍 뚫린 파이프란 말인데 땅을 한 2미터정도 파고 구멍 뚫린 파이프에 보온덮개 천을 감아서 묻으면 파이프에 스며든 물이 도로 밑을 통해서 아랫집 밭으로 자연스레 배출되지요.”
“보온덮개 천은 왜 감는데?”
“그걸 감지 않으면 파이프구멍으로 흙이 들어가 토양이 유실되어 나중에 푹푹 꺼지게 되지요.”
“그렇구나.”
“예. 파이프하고 자재 사다가 오후에 묻어드릴 게요.”
“그래. 그래주면 고맙지.”
하면서 골조 옆에 스티로폼이 들어간 두꺼운 패널로 벽을 치고 지붕을 올리는 인부들을 바라보는데
“외삼촌, 평지작업이 예상보다 엄청 많이 힘이 드네요. 그까짓 대나무를 비는 거를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대나무뿌리 빼는 것이 그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요. 또 외삼촌 땅에는 위에서 내려온 대나무는 물론 소나무, 참나무, 등나무, 아카시아등 온갖 나무들이 얽혀있고 골티골짝 물이 넘쳐서 모래자갈과 방구돌이 한 없이 흘러 내려와서 대만 비면 되는 산비탈보다 몇 배나 힘이 듭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나중에 실제로 든 경비, 실비는 챙겨주꾸마.”
“예. 고맙습니다.”
하고 다시 포클레인 쪽으로 걸어가던 또식씨가
“외삼촌 참 대단하십니다.”
하고 빙그레 웃어
“야야, 그 기 무슨 말이고?”
“골티물 내려오던 도랑말입니다. 모래자갈과 방굿돌이 얼마나 많이 떠내려 왔는지 포클레인 기사가 그 바위들만 해도 축대를 쌓겠다고 합디다.”
“그러면 잘 된 일 아이가?”
“그 기 아이라 그 돌을 다 처리하는 데만 해도 수백만 원이 들고도 남을 텐데 기연씨 하고 프라임건설에 큰소리 탕탕 치면서 단돈 100만원에 공사를 떠넘기고 현주한테는 외삼촌이 도로에 들어가는 땅을 기부한 셈이 되고 말입니다.”
“허허, 그 기 그래 됐나?”
“그리고 만약 그 하천을 그대로 두고 양측으로 석축을 쌓고 배수시설을 했으면 돈도 또 수백만 원 들어가지만 땅도 한 20평 날아갈 번했습니다.”
“이 사람아, 땅이 날아가다니?”
“예. 땅이야 그냥 있지만 그게 도랑이 되서 외삼촌이 그 좋아하는 채전밭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 우짜다가 보니 그래 됐다.”
하고 한참이 지나
“외삼촌 점심 먹으러 갑시다.”
하며 자동차를 갖다 대는지라
“와? 너거 집에서 안 묵나?”
“예. 인자부터 사묵기로 했심더.”
“와?”
“지희엄마 음식솜씨가 식당 할 수준도 아이고 또 일군 몇 명 밥해주고 판판이 놀 형편도 아니고...”
“그래. 잘 생각했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비죽이 웃음이 떠오르는 걸 내색 않으려고 하는데
“외삼촌, 내리시소. 돼지국밥은 언양바닥서 여게가 국물이 최곱니더.”
남천내공굴 건너 오른 쪽 보람병원 못 가서 차를 세웠다.
(야, 여게 옛날 서울의원자린데. 서울서 온 젊은 의사와 얼굴이 해뜩하던 같은 반의 병원 집 딸, 비가 많이 와서 남천내 공굴 위에 물이 넘치면 다른 아이들은 휘파람을 불며 뛰어 건너는데 물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던 단발머리, 토박이 김태진병원을 못 이기고 병원을 옮겨가며 전학했는데 나중에 동창회에서 들으니 병원집 딸답지 않게 뇌염으로 죽었다던가...)
한참이나 회상에 빠지는데
“외삼촌, 반주 한잔!”
연변아저씨가 소주를 부어주고 건배를 하고 국물을 한 술 떠 넣으니 과연 담백하고도 구수했다.
그날 오후 비가 내리면서 이튿날은 몸이 녹작지근해서 부산에서 하루를 쉬는데 또식씨가 전화로
“외삼촌, 큰 일 났읍니다.”
“와, 밑에 집이나 강씨문중에서 길 때문에 뭐라 카더나?”
“아임니더. 비가 왔다고...”
“그래 비가 왔지.”
“외삼촌 땅 전체가 물구덩이가 되고 물이 펑펑 쏟아지는 곳이 두 군데나 된다 말입니다.”
“우짜노? 또 유공파이프 묻어야지.”
“그게 백호라는 작은 굴삭기 부르고 자재비에 인건비에 구멍하나 막는데 적어도 50만 원은 든다 말입니다.”
“우짜겠노. 내 실비는 준다 캤지.”
“알겠심더.”
이튿날 마음이 불안해 허위허위 올라가니
“외삼촌, 급한 데로 두 군데 파이프 묻었는데 자고 나니 또 두 군데 터졌습니다.”
어제 공사를 한 곳 두 군데와 방금 퐁퐁 물이 새어나오는 곳 두 군데를 가리키더니
“아이구야! 여게 또 물이 세네.”
베어낸 소나무등걸과 밀어붙인 대 뿌리의 작은 산봉우리만한 무더기 밑에서 또 졸졸졸 흘러나오는 물길을 가리켰다. 순간 갑자기 소나기 한 줄기가 쏟아져 급한 대로 이제 지붕공사가 거의 끝난 열찬씨의 건물 안 자재무더기 틈에 앉아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며
(큰일이다. 벌써 다섯 곳이 터졌으니 5*5는 25, 250만원 추가경비가 났구나!)
가뜩이나 건축비가 모자라 걱정인 영순씨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나 곰곰 궁리를 하다 한 30분쯤 지나 비가 그치자 밖으로 나오는데 아뿔싸! 건물 앞으로 데크를 놓을 자리에 물이 한강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직은 전체가 웅덩이가 되어있는 밭에 나중에 물이 빠지면 또 몇 군데나 물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물이 터져도 그냥 두게. 장마가 오고 나서 전체를 다시 둘러보고 별도 공사를 하세.”
하고 내려왔는데 그날 밤 밤새도록 비가 내리더니 일기예보에서 울산지방에는 무려 150mm가 내렸다고 했다. 또식씨에게 전화를 하니 온천지가 물바다라고 하면서 오늘 올라오시면 속이 상한다고 한 2,3일 후에 오라고 했다.
이틀 후 일요일 영순씨와 함께 현장에 가니 건물앞쪽으로 무슨 강물처럼 물이 휩쓸고 가 굵은 돌이 불거지고 바닥이 파인 것이 흡사 깊은 계곡에 캠핑이라도 온 기분이 들었다.
“야, 장난 아니네. 우리 제부가 속 꽤나 상하겠네.”
동행한 미혜씨가 걱정스레 바라보는데
“외삼촌, 물이 까바지니 새로 파이프 묻을 데가 여덟 군데고 저게 언덕 밑에는 옛날 우물터라서 그런지 얼마나 물이 많이 새는지 도무지 대책이 없습니다.”
또식씨가 짐짓 송구스런 표정이라
“우짜겠노? 업자 잘못도 아이고 지주 잘못도 아이고 하늘이 하는 일을. 자 여덟 곳은 땅이 좀 마르면 바로 유공파이프를 묻고 저 위에 우물터는 연구를 좀 해보자.”
하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열찬씨가
“큰 구멍 말고도 두 구멍이나 더 물이 나오네. 내 생각 같아서는 한 댓 평되는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도 키우고 수면에 옥잠화, 수련을 띄우고 물가엔 갈대 같은 수초를 키웠으면. 그리고 작은 도랑을 만들어 잔디밭가운데로 흘러가게 하고.”
하는 순간
“이 양반이 방금 시를 쓰네. 보소, 지금 우짜면 물을 빼고 추가공사비를 마련할지가 걱정이지. 음풍농월 연꽃이나 들먹일 때요?”
영순씨가 버럭하자
“와 그라노? 가서방도 나름대로 연구를 했겠지. 그라고 내가 들어봐도 그럴 듯 하고.”
“언니야, 말은 맞는데 장마철에나 나오는 물로 무슨 고기를 키우고 연못을 만들겠노?”
“그런가?”
그러고 보니 영순씨의 말이 제일 정확한 것 같았다. 작년 가울에 땅을 사고 반년 이상이나 메말랐던 땅이 장마철이 된데다 위쪽에 공사를 해서 골티골짝 물이 쏟아진 일시적인 현상인지도 몰랐다.
“외삼촌, 이건 제 생각인데말입니다. 물이 새는 위쪽에는 삼촌말대로 한 서너 평 웅덩이를 만들어 다문 미나리라고 심고 그 아래에 전체 물을 받을 수 있는 우물을 하나 파는 겁니다.”
“우물, 우물하나 파는데 돈이 엄청 든다는데?”
“그건 지하수를 개발해서 식수를 확보하는 경우이고 이 경우는 펑펑 쏟아지는 물을 모아 한꺼번에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는 거지요.”
“그래. 그게 가능할까?”
“예. 땅을 깊이파고 콘크리트 도깡을 대여섯 개 묻어 한 5미터쯤 수심을 유지하면 일 년 내내 물이 넘지는 않은 겁니다.”
“큰돈 들여 공사한 그 물은 어디에다 쓰고?”
“물론 수질검사를 해서 식수로도 쓸 수 있겠지만 수질유지나 소독도 쉽지 않으니 평소에는 그냥 두고 가뭄 때 밭에 물을 주거나 생활용수로 쓰면 되지요.”
“그래. 견적은?”
“빼봐야 되지만 한 2,3백은 나오겠지요.”
“야, 배보다 배꼽이 커다더니 150만원 견적의 평토공사에 천만 원도 더 들겠다.”
“우짜겠능교? 이미 벌린 춤인데.”
씨익 웃는 조카의 표정에 이미 청부업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걸 보며 영순씨의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야야, 봐라.”
미혜씨가 끼어들더니
“내가 너거 집 완공될 때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멀쩡하니 가능할 것도 같고 말이야. 내 처음에는 입주할 때 냉장고든 뭐든 가전제품 큰 거 하나 넣어줄라고 생각했는데 마 지금 공사비로 몇 백 보태줄까?”
“언니는 무슨 소리를?”
“하긴 니 자존심에 받아들일 택이 없지만 그래도 급하면 이야기해라. 우리가 어데 남이가?”
유공파이프 여덟 개 400만원, 우물하나에 250만원을 잡으면 졸지에 650만원 추가경비가 난 것이었다.
“처형,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이래도 적자, 저래도 적자라면 고기라도 한 번 실컷 먹읍시다.”
“물론! 그렇지만 고기는 내가 살게요.”
집에 돌아온 내외가 제대로 씻을 틈도 없이
“당신은 우째 생각하는데?”
“뭐를?”
“날만 새면 추가경비가 나서 앞으로 얼마나 돈이 더 들어갈지 모르는데?”
“우짜겠노? 들면 들어야지.”
“벌써 2,3천이 부족한데 앞으로 한 5천이 부족하면 다 우짤긴데.”
“뭐 차차 생각하지.”
“아이구, 이 양반 속도 좋다.”
영순씨의 짜증에 열찬씨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꺼내자
“이 양반아, 아무 대책 없이 술은 와 또?”
“마 당신도 이리 온나? 골치 아플 때 한잔 묵고 보면 생각이 날지 아나?”
하고 한 병을 나눠먹고 잠이 들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