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34. 정재와 유경

권력은 무한하지 않아. 권력을 위한 음모 계략 모략 전략 기만의 천재이자 명수(名手)인 나도 평생 권력을 누릴 것같았지만 다 허무하게 잔혹하게 끝나고 말았지. 그게 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신세한탄을 좀 할까? 처음보는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네가 어리고 순진해 보여서야? 너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 같은데 어찌 여기 들어왔을꼬? 너 몇 살 때 죽은 거야? 그야말로 요절했구만?

나 스무살 때 죽었다 왜, 꼽냐? 어디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한테 피도 안말랐는니 버릇없게 그래. 난 나이는 어렸지만 병사들을 통솔하는 대장군이었어. 사람을 나이로 따지는 게 아니야. 알았나? 그냥 너 하던 얘기나 해. 너 말하는 거 보고 내 사연도 말하마.

기분 나빴다면 미안? 나 여기 하도 오래 있어서 예의같은 거에무뎌졌나봐. 내가 정재 너한테 좀 예의 없게 굴었는데, 그래도 내 이야기 들어주겠다니 고마워. 난 공주였다가 왕비였다가 여왕이 되었어. 그런 내가 권력을 떵떵 누리다가 처참한 몰락을 맞이한 거 까지는 그렇다쳐. 그런데 내가 인류사 최악의 악녀로 종종 꼽히게 된 건 억울해. 나보다 나쁜 놈들은 당연히 훨씬 많고 또 나보다 나쁜 년들도 많아. 그런데 내가 최고의 악녀로 꼽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아. 그 원인이 무얼까 생각하다 낸 결론은? 내 상대가 너무 쎈 자들이라는 거야. 나랑 처지가 비슷한 인류사 최악의 남자가 나랑 신세가 비슷해. 너, 히틀러라는 사람 알지.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라는 말 자체가 악의 대명사가 되었어. 그는 자기네 나라에서조차 입에 올려서는 최악남이 되고 말았지. 그는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야. 그렇다고 그가 인류사 최악의 악마라고 하는 건 아니야. 대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많았어. 알렉산더, 시이저, 징키스칸, 나폴레옹 등등등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라고 다 악마화 되는 건 아니야. 악마가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영웅이 되기도 하지. 미국의 어느 유력 언론사는 지난 천년 밀레니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원톱의 인물로 징기즈칸을 꼽더군. 전쟁광인 그가 잔혹하게 죽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그는 숱한 전쟁과 전투에서 승리하였기에 영웅이 되었어. 그런데 히틀러는 패장이 되었지. 정의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히틀러가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도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좀 따져볼 일이라고 해도 그가 인류사 최악의 악마가 된 건 딴 이유 때문이야? 그가 죽인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거야. 2차대전 때 히틀러를 추앙하는 나치놈들이 학살한 유대인이 600만명이라는데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서 그가 최악남이 되었을까? 히틀러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죽인 권력자들은 많아. 직책이 장군은 아니라지만 히틀러한테 적장(敵將)이었던 스탈린은 히틀러가 죽인 유대인 600만명보다 더 많은 사람들, 그것도 자기네 같은 민족을 수천만명 죽였어. 그것도 히틀러처럼 자기네 독일민족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자기 혼자의 막강한 독재권력 유지를 위해서. 그렇다고 그를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 꼽지는 않아. 그냥 잔인한 독재자 스탈린이라고 하지. 그리고 그는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이긴 승자(勝者)였기에 최악남이 되지는 않았어. 물론 스탈린과의 전쟁에서 진 패자(敗者) 히틀러라고 최악남이 되지는 않았어. 그가 인류사 최악의 악마가 된 이유는 따로 있어. 스탈린과 히틀러 둘다 전쟁 중에 적군을 죽인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을 아주 많이 죽였다는 공통점은 있어. 스탈린은 자국민을 죽였고 히틀러는 유대인을 죽였어. 그 차이가 엄청나. 그 차이로 인해 스탈린은 그냥 잔인한 독재가 정도로 평가되는 거고 히틀러는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 평가되는 거야. 히틀러가 만일 유대인 600만명이 아니라 유대인보다 힘이 약한 민족들을 600만명이나 죽였다면 그는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까지 비난받지는 않았을 거야. 유대인 그들이 어떤 민족이야! 엄청난 민족이지. 어느 한 곳에 한 나라를 이루며 몰려살던 한 민족이 여러 곳 여러 나라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의 기원이 되는 민족이 유대인이야. 한마디로 디아스포라의 기원이야. 2000년 넘게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은 1948년에 한 곳에 몰려 살게 되었지. 민족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를 갖춘 현대 이스라엘의 탄생이야. 그 이전에 2차대전 때 그 유대인을 증오하던 히틀러와 나치 일당은 유대인을 마구 학살했어.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지금 전세계를 휘어잡고 있지.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고 쪼그만 이스라엘 하나 손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지. 특히 미국내 유대인들은 돈을 휘어잡고 있어. 전세계 금융을 휘어잡고 있다지. 내 정확하게는 잘 몰라도 사람들 말이 그래. 특히 유대인들은 하도 똑똑해서 노벨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민족이야. 그런 유대인을 히틀러가 건드렸으니 히틀러는 최악의 악마가 된 거야. 만일 히틀러가 유럽의 집시족들을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죽였다면 히틀러가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까지 불릴까? 아닐 껄. 그냥 잔인한 패자로만 남았을 거야. 사실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 불리려면 타민족이 아니라 자기네 민족을 수천만명이나 죽인 스탈린이 더 악마 아니야. 그런데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지. 더군다나 스탈린은 자기네 소비에트 연방인 소련 내 러시아 사람만 죽인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 사람들 800만명도 굶겨 죽게 한 악마이기도 하지. 악마의 질로 따지면 스탈린이 히틀러를 능가해. 하지만 히틀러가 최악의 악마로 불리는 건 그가 죽인 사람들이 유대인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내 말이 맞을 거야. 인류사 최대의 악녀로 불리는 내 신세가 히틀러랑 다를 게 없거든. 히틀러나 나나 다 유대인을 죽였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인류사에서 나보다 악독한 년들은 많았어. 난 단지 나의 공격대상이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로 그런 오명을 쓰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난 여기서도 맘이 편하지가 않아. 내 딸년도 나랑 같이 인류사 최악의 모녀로 꼽히는데 내 딸은 별 나쁜 짓 저지르지 않았어. 북이스라엘에서 자랐지만 정략결혼을 해 남유다로 가서 여왕이 되었을 뿐이야. 그러다 자기 아들을 죽인 유대인들을 죽였는데 그로 인해 보복을 받아 37살에 살해당안 불쌍한 애야. 어미 마음은 찢어져. 딸도 유대인을 죽인 죄로 나처럼 악녀가 된 거야. 유대인들은 자기네 민족을 죽인 사람에 대해 집요하게 보복하지. 유대인들을 죽인 이방 출신 여왕이었던 나와 내 딸은 죽어서까지 고통을 받고 있어. 명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 내 아무리 유대인들을 죽였다고 해도, 그래서 내가 악한 년이었다고 하지만 인류사 최악의 악녀로 날 칭하는 건 도무지 공평하지가 않아. 나보다 악마같은 년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저기 중국이라는 나라에서만 해도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마누라이면서 유방이 죽자 자기 여씨족의 나라를 만들려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여태후,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의심되는 년놈들을 무수히 죽인 측천무후, 나라가 망하던 말던 호의호식하면서 수많은 정적들은 물론 하룻밤 즐긴 멀쩡한 젊은 남자들을 죽인 서태후가 있잖아. 그 년들은 나보다 더 악독했어. 특히 여태후가 남편 유방을 꼬신 구멍이라며 애첩인 척부인의 음부를 짓이기겼어. 그것도 모자라 눈알을 뽑고 혀를 뽑고 귀를 멀게 하고 팔다리를 잘라 돼지 우리에 가두었어. 그토록 아름답던 척부인을 인간 돼지로 만든 사건 만으로도 인류사 최악의 악녀가 되기에 충분해. 그런 년들에 비하면 나는 순진한 편이야. 그런데도 난 인류사 최악의 악녀가 되다니! 세상에 공평한 건 없어. 결국 힘쎈 놈들이 고인에 대한 평가마저 하고말지. 순전히 오로지 힘쎈 자기네 관점과 입장 수준에서. 객관적이고 뭐고 한 건 없는 거야. 정재, 너는 그런 나 유경을 어찌 생각해. 내가 정말 인류사 최악의 악녀야? 너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싶어. 객관적 차원에서 말해줘. 내 앞이라고 날 위로하는 말을 하진 말아줘.부탁해!

이 시대에 강한 민족으로 부상한 유대인을 공격한 죄로 인류사 최악의 악녀로 선정되어 억울한 여왕

내 요청대로 정말로 객관적인 입장 시선 관점 수준 차원에서 말해볼게.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는 억울할 만해. 네가 인류사 최악의 악녀로 꼽힐 이유는 없어. 다만 너무 강한 민족으로 부상한 자들을 건드렸다는게 이유라면 이유이겠지. 너는 좋은 여왕은 아니었다고 해도 인류사 최악의 악녀는 아닐 거야. 그렇게 오명을 받는 건 객관적으로 볼 때 불공평해. 이게 나의 평가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주었다니 고마워. 단지 내 앞이라고 위로하는 말은 아니겟지. 그런데 조금 위로가 되네.

그런데 말이지.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객관적 절대적 틀림없는 확실한 분명한 진리나 정의 따위는 없어. 불공평한 세상이 사람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세상이야. 다 승자이고 강자가 세상을 좌우하지. 진리고 정의고 공평마저도. 그게 사람 세상이야. 그런 엿같은 세상은 변하지 않아. 세상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바꾸겠다는 건 달성불가한 꿈일 뿐이야. 오로지 전지전능한 신만이 세상을 공정공평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신은 죽었다는 철학자가 있더구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절망적인 세상이야. 그 험한 세상을 저 아래 세상 사람들은 늘 항상 언제가 변함없이 살아가야 해. 그런 세상에서 공평과 공정을 논하려면 조건이 있어. 승자 강자가 되어야 해. 패자 약자는 그런 걸 논할 힘이 없어. 너는 결국 패자 약자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 와서 그렇게 수모를 당하는 거야. 징키즈칸은 승자 강자가 되었기에 세상 사람들한네 지난 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 숭배되어 여기 어딘가에서도 떵떵거리며 명복을 누릴 수 있는 거라고… 세상이 그래. 너무 억울해 할 필요도 없어. 네가 너의 오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너의 후예들이 강자 승자가 되어야 하는데… 저 아래 세상 판을 보아하니 지금도 맨날 유대인에게 깨지고 있는 거같던데...

아! 그게 날 열받게 해. 나의 후예들은 아직도 유대인들에게 당하고 있어. 유대인 그 놈들은 쎄도 너무 쎄. 나 때는 우리랑 비슷했었는데 지금은 엄청 훨씬 세졌어. 나라 잃고 이천년동안 디아스포라를 겪으면서도 결국 살아났어. 언젠가 또 약해지더라도 그 놈들은 다시 쎄질 거같아. 징한 놈들이야. 모진 년놈들이야.

지금 여기와서 불평하면 뭘해. 그냥 상황을 받아들여. 인류사 최악의 악녀로 꼽힌 걸 그냥 덤덤하게 수용해. 아니라고 부정할수록 너만 힘들어져. 여기서까지 불불댈 필요 없어. 그냥 차분한 명복을 누려. 혹시 너랑같이 악녀로 꼽힌 너 딸도 여기 있는 거야. 있다면 모녀끼리 대화도 하고. 살아생전에 못했던 얘기도 하면서…

정재, 너 어려 보이는데 생각은 어른 같네. 스무살 나이에 죽었다며? 여기서 제일 어린 거같은데. 넌 어쩌다 그렇게 조숙했졌니?

나는 나이는 어렸어도 생각은 노련했어. 바다 건너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시 쳐들어 갔을 때 내 나이는 고작 열여섯 밖에 안되었지만 나는 총대장이었어. 그만큼 통솔력도 있었지. 배짱도 있었어. 물론 내가 어린 나이에 그런 높은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내 양아버지의 막강한 권력 때문이었지. 그런데 양아버지가 죽자 권력찬탈을 위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나는 양아버지 편에서 싸우다 결정적 순간에 적군 편에 서서 싸우게 되었지. 나의 배반으로 양아버지 쪽 군대는 패배했어. 이후 양아버지 가족은 완전히 몰살당하고 말지. 그래도 나는 전투 막판에 승자 편에 섰기에 전투 이후 잘 나갔어. 그러다 2년 만에 죽고 말아. 내가 요절했어도 나에 대한 사후 평가는 그런대로 나쁘진 않았어. 그런데 나 죽고 266년이 지난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유신으로 몰락했던 양아버지 쪽 후예들이 득세하면서 권력을 다 차지하게 되지. 그러면서 나는 양아버지를 배신한 최악의 배신자가 되더군. 충신이 되거나 배신자가 되거나 하는 것도 다 승자가 정하는 거더군. 나는 양아버지 군대에서 싸우다 갑작스레 적군에게 붙어 싸웠으니 내가 배신자는 맞아. 내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건 아니야. 배신 행위가 지옥에서 가장 최고의 죄로 여겨지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난 배신할 만했어서 배신했을 뿐이야. 누구라도 나같았다면 다 배신하게 되었을 거야. 그 자세한 정황을 여기서 말하기 힘들어도 나한테 배신은 자연스러웠던 거야. 그런 전반적 맥락은 싹뚝 잘라서 그냥 배신했다는 단편적 사실 하나 만으로 나는 최고의 배신자가 된 거야. 나도 너처럼 억울한 점이 많아. 그래도 세상이 공평하고 공정한 게 아니라는 걸 여기 들어와서 깨달았지. 그래서 아까 너한테도 저 아래 동네 사람사는 세상이 원래 공평하고 공정한 게 아니니 너무 열받지 말라고 조언했던 거야. 나는 너보다 일찍 깨달은 덕분이었지.

와우! 나는 여기 들어온지 3천년 가까이 되어도 그런 걸 못깨달았는데 너는 여기 들어온지 3백년이 조금 안되서 그런 걸 깨달았다는 거네. 역시 정재 너는 스무살 나이에 요절했지만 여기 들어와서 생각이 성숙하고 노련하네. 그런데 밖이 좀 어수선하네. 시끄럽기도 하고. 정재, 좀 알아봐. 뭔 일이 일어나는 건지.

박기철 교수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