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퇴계 선생 400주기를 기념해 1970년 서울 남산 시립도서관 앞에 세워진 퇴계 이황의 석상 [위키피디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文章)이 일찍 성취되었고 …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선조수정실론』 -선조 3년 12월 1일-

퇴계의 졸기(卒記, 사관이 망자亡者에 대한 세간 혹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실릴 정도면 당대에 대단한 인물로 평가 받은 사람이다. 사관이 썼으니 비교적 공정할 것이다. 그러나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란 대목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퇴계는 ‘검약’(儉約)했으나, 결코 ‘빈곤’(貧困)하지는 않았다.

한국 철학사를 보면, 대체로 퇴계는 빈곤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집안 출신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성장 후의 경제사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며, 12살 때부터 작은아버지로부터 공부를 배웠습니다.”(『이야기한국철학Ⅰ』/p.256).

“양반가문이라고는 하나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갈 정도로 풍족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다.”(주홍성 외/『한국 철학사상사』/p.235).

유학의 세계관 중의 하나는 ‘경리중의’(輕利重義) 사상이다. 이익(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도리)를 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선비(유학자)들은 드러내놓고 재부(財富)를 자랑하지 않았다. 차라리 빈한(貧寒)한 삶이 고결한 인품의 상징처럼 윤색됐다. 그러나 실상은 아주 다르다.

역사에서 뛰어난 한 사상가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상사적 의미는 철학자가 적격이겠으나, 그 사상가의 전체 면모는 역시 역사가의 눈이 더 정확하다. 역사가 이이화는 퇴계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그린다.(『한국사 이야기』➉/p.139-40).

「이황은 경상도 예안의 시골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진사로 행세한 정도였으니 서경덕의 신분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재산이 넉넉해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과거 공부에 열중해 30대 초반에 문과에 합격해 비교적 순탄하게 벼슬길을 걸었다. 그 거친 사화의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고 잘 피해나갔다. 그의 신중한 처신과 원만한 성격 탓이었다.

그는 두 차례나 지방 수령으로 나가 농촌의 현실을 직접 보았고, 성균관 대사성을 두 번 역임하면서 철저하게 유학으로 무장한 관리를 양성했다. 그 후 판서 따위의 요직을 거쳐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 선비 출신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것이다.

그는 60대 후반이 되자 선조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원을 짓고 학문 정리와 제자 양성에 진력하다가 3년이 못 되어 죽었다. 이 기간이 그에게는 성리학 이론을 정리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보기 드물게 벼슬과 학문의 명예를 동시에 누린 행운의 인물이었다.」

후세인인 우리는 퇴계를 그의 학문적 성취와 올곧은 도학자로서의 면모만 기억한다. 부정적인 면은 없고, 오직 긍정적인 면만 부각된 이미지이다. 인간은 본래 여러 가지 ‘페르소나’(persona, 가면)로 사회생활을 한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도둑도 자식 앞에는 정직한 사람의 가면을 쓴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일지라도 그의 밝은 한 페르소나만 조명하면, 그의 진면목에서 멀어질 뿐 아니라, 세인들도 그의 삶에서 올바른 교훈을 끌어낼 수가 없게 된다.

이이화는 ‘퇴계는 드물게 벼슬과 학문의 명예를 동시에 누린 행운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여 보자.

성리학의 거두로 지금까지 영예가 높으니 학문적 성취는 일단 차치하자. 한데 최고직인 영의정을 지낸 것도 아닌데, 왜 벼슬의 명예도 누렸다고 하는가? 이는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는 데 있다.

홍문관은 국왕을 자문하는 정책연구기관이고, 예문관은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이다. 이 양관은 국왕의 정책을 자문하고 보필하는 기관이다. 이 양관의 책임자가 정2품 대제학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두 곳의 대제학을 가장 영예로운 벼슬로 꼽았다. 하여 이이화는 퇴계가 벼슬에서도 명예를 누렸다고 평가한 것이다.

‘부귀명예’(富貴名譽), 현대인뿐 아니라 조선 양반들도 추구한 삶이다. 그러나 ‘경리중의’란 유학의 가르침에 의해, 조선의 선비들은 명예는 드높이고, 귀는 학문과 관련된 관직에 한정하고, 부는 애써 멀리했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다르다.

퇴계는 조선 선비들로서는 드물게 벼슬과 학문의 명예를 동시에 누렸다. 그렇다면 퇴계의 ‘부’(富)는 어떠했을까? 어떤 자료에 따르면 퇴계의 재산은 무려 현시가로 667억 원이었다고 한다. 이는 성리학의 쌍벽이었던 율곡 이이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율곡은 대사헌과 양관 대제학 등 고관 자리를 지내면서도 현실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말년에 당쟁이 일어나 반대파인 동인이 당쟁을 조장한다고 비난했을 때, 그는 깨끗이 사직하고 물러났다.

그 뒤 서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해 처자가 여기저기 옮겨 다녔으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기 어려웠다. 율곡이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집에 양식이 없어서 손님을 접대하지 못했으며, 남의 옷을 빌려서 염습하였다고 전해진다.

퇴계는 달랐다. 막대한 재산가였다. 그는 어떻게 재산을 불렸으며, 왜 비난 받지 않았을까?<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