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칼럼] ‘회고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김상일 승인 2021.06.03 09:49 | 최종 수정 2021.06.03 11:29 의견 0

참 이상하다. 김일성을 ‘가짜’라 해 놓은 마당에 김일성의 회고록을 왜 그렇게 두렵고 무서워하고 접근도 못 하게 하는가? 가짜 인물에 관한 회고록을 왜 그렇게 경지원지 하는가? 심지어는 국민의힘 당마저도 문제 될 게 없다 하는데, 공안 검찰과 경찰은 김일성 회고록 영인본을 펴낸 민족사랑방 대표 김승균선생 집을 압수수색까지 했다. 압수 수색을 했다는 것은 앞으로 기소와 재판까지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수술을 앞 둔 아내 앞으로 이정훈 4.27연구소 소장 구속영장을 통지 했다. 4.7 보궐 선거 압승에 다시 자신감과 승기를 잡았다는 말인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전 8권은 1930년대에 김일성의 항일유격활동 기록이 거의 전부이고, 사후 유작인 7-8권도 해방과 함께 김일성 일행의 귀국까지가 전부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회고록 출판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가? 이는 저들이 말하는 ‘김일성 가짜론’과도 상반된 행위가 아닌가? 회고록을 저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김일성이 진짜라는 것을 스스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족사랑방이 국내 출간한 '세기와 더불어' 1권 표지. 민족사랑방 제공
민족사랑방이 국내 출간한 '세기와 더불어' 1권 표지. 민족사랑방 제공

여기서 그 이유를 진단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 회고록의 반대하는 부류를 1,2,3호로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회고록 내용 속에는 김일성이 15년간 싸우는 동안 적어도 세 무리의 적들이 있었다. 그 첫째가 일제이고, 그 둘째가 민족진영 안의 우익들이고, 그 셋째가 공산당 자체였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세력들은 남한 안에 아직도 보수와 진보를 다 망라해 엄연히 잔존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회고록’하면 서로 카르텔을 만들어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다.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한다.

김일성 부대가 일본 놈들을 잡아 족친 그 사실 하나가 싫다는 것이다. 외국 특히 프랑스인들이 볼 때에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할 것이다. 아프리카 콩고나 우간다 같은 나라 사람들이 볼 때에도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것이다. 나라를 35년간이나 식민통치를 통해 창씨개명까지 하고, 꽃다운 처녀들을 잡아다 청춘과 인생을 다 망쳐 버린 일본을 찬양하고 좋아할 리가 있겠느냐고 할 것이다. 이 지구촌 유래가 없는 일이 지금 세계 10대 부유 국 가운데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인정되고 있다. 지구상에 자기나라를 식민 통치한 나라를 우방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 나라와 싸운 사람들을 고문과 치사를 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한국 말고는 없다.

나라 안 일련의 지식인들과 교수들이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로 돌출되고  있으며, 이들의 과감성은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수요집회에까지 나타나 친일본적 데모를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조중동’이란 굴지의 언론들이 바로 반일종족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회고록 출판을 반대하는 세력이 일본과 그 앞잡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의 재침략을 쌍수로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1호들에게 회고록은 목의 가시 같을 수밖에 없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소위 '토착왜구' 세력들은 죽어서 국립묘지에 안장까지 되고 있으며, 한국 정치학자들의 80% 이상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찬성한다고 한다. 즉,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되었고 지금 이만큼이라도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1호들을 ‘토착 왜구’라 하며 서울 한 복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 생일 축하 잔치에 얼굴을 내밀 정도이다.

2호는 상해 임시 정부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반공 보수 민족주의자들이다. 이들은 1929년 ‘왕청문 사건’으로 알려진 것에 여실히 나타난다. 중국 동북 홍경원 왕청문에 국민부가 남만 청총대회에 참가한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을 왕청문 피모진구 산골짜기로 끌고 가 돌로 머리를 쳐 무참하게 살해한 ‘남만청총대회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만청총과 남만 청총을 통합하여 효과적으로 항일투쟁을 하자고 모아 놓고는 이렇게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민부의 현준목이 주도했고, 이 때 죽은 청년들은 모두 20대 이었으며, 그 중 남만 한촌에서 간 최봉은 돌아와 김수련이와 결혼식까지 올리기로 돼 있었다. 이 소위 민족주의 계열은 지금의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고루 망라해 있으며 민주당이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 없다. 회고록 반대 2호가 바로 이런 자들이고 아직도 살아있는 권력들이다. 

이들은 김좌진 장군의 살해를 지금도 김일성에게 돌리고 있으나 이것은 다음에서 말할 3호들이 한 짓이었지 김일성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들 국민부 후예들은 토착왜구들과 한 패가 되어 정치 현장에 살아 있는 권력이다. 이들이 일제와 싸운 공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같이 만주벌에서 피 흘리며 싸운 사회주의 계열하면 1호보다 더 할 정도로 반대이다.

1939년 5월 23일 항일련구 제1로군 제2방면군은 김일성 지휘 하에 두만강을 건너 화룡땅에 들어가 홍기하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적 70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 100여 자루의 총, 무전기 1대, 탄알 수 만 발을 노획했다. 일본군 지휘관 마에다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는 항일유격대 역사상 큰 성과를 낸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고 이창기는 홍기하 전투 현장을 답사하고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생포된 일본군들의 신원을 알고 보니 거의 조선 청년들이었다. 백선엽과 정일권 등이 이끈 간도 토벌대 대원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남한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죽어서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한국의 소위 보수들이란 전 세계 유래 없이 이들 일본 앞잡이들이다. 이들의 후예들이 엄연히 지금 등록된 야당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들이 회고록을 반대하는 2호들이다.

이들 2호들은 쉽게 당명의 수 차례 바꾸어 가면서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국회의원 노릇까지 버젓이 하고 있다. 심지어는 광복회 유족 회원으로까지 활약하며, 지금의 지도부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들 2호들은 1호 토착왜구 이상으로 회고록을 반대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3호이다. 김일성은 15년 동안 일제보다 더 자기를 어렵게 하고 적대시 한 세력이 바로 ‘공산당’ 즉,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 같은 극좌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이들이 1930년 5월 30일에 일으킨 폭동의 후유증은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훼방이 되고 말았다. 이 종파주의자들은 은수저 하나만 부엌에 있어도 친일 혹은 부르주아라고 닥치는 대로 인명을 살상한 짓을 5.30 폭동에서 자행했다.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손실을 초래하였다. 고무도장을 파 수시로 당을 만들었다 부수며 돌아 다녔다. 결국 이들 때문에 1928년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 만다. ‘조선의 별’에서 김일성은 자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사회주의자’라고 단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아직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자로 보아 악선전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중들이 이를 분간할 지식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통일은 이를 분간할 때에 올 것이다. 회고록의 많은 분량은 이들 종파주의자들의 죄과에 대해 적고 있다. 

이들 극열 종파주의 자들이 저지른 과오와 만행을 김일성에게 돌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김좌진 장군을 살해한 부류는 이들 좌경 종파주의자들이지 김일성 부대가 아니었다. 이런 무분별한 처사가 회고록을 반대하는 어쩌면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좌파들은 지금도 소위 민중파(피디)라는 이름으로 상존하고 있다. 이들은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자들이며 주체사상이라 하면 극 보수 이념보다 더 반대를 한다. 지난번 이정희 통합 민노당이 해산당하고 이석기 구속 될 때에 결정적으로 뒤에서 추동한 세력이 지금도 진보의 이름으로 명색을 걸고 버젓이 정당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역시 김일성 회고록 출간에 찬성할 리 없다. 

마르크스-레닌 공산당이론을 아무런 비판적 시각도 없이 그대로 계급 투쟁이론에 적용하여 극우 보수 이상으로 ‘민족통일’ 전선을 훼방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이들이 회고록 출판 반대 3호인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회고록 반대는 보수와 진보할 것 없이 전 방위적으로 깔려 있으며, 나아가 국가보안법 폐지에도 이들 세 세력들이 반대할 것은 명약관화 하다. 

이들 세 부류들은 ‘북핵’ 운운하지만 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김일성’이란 이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백두산은 늠름히 높이 솟아 있고, 압록강은 유유히 흐른다. 김일성 항일유격대원들이 흘린 피는 아직도 선혈로 남아 있고, 장백산과 압록강 굽이굽이마다 고여 있다. 회고록은 북에서 과거가 아니고 현재이다. 

그러나 회고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필독을 해야 하고, 특히 북과의 대화를 진정으로 원하고 통일을 바란다면 위정자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병법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때 결국 제 발등에 도끼 찍는 불행이 초래되고 말 것이다.

첫째로, 회고록을 읽지 않으면 북.중 관계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중공당은 1930년 대 초 일제가 만든 민생단에 조선 공산당이 들어 있다고 무차별 참살을 하는데, 그 수가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김연수의 소설 ‘밤이 울고 있다’는 화룡 근처 아랑촌에서 민생단 혐의로 죽고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다. 이 민생단 사건 하나로 중공당은 1980년대 사과를 했고, 그 주동자들인 동장영과 종자운등을 심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은 오히려 북에 발목이 잡혀 있으며, 민생단 원죄를 북에 지고 있다. 회고록을 읽지 않고는 북-중 관계의 아킬레스건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민생단 사건은 북이 선군정치를 하게 된 이유를 알게 한다. 민생단 사건으로 열린 회담이 다홍훼 회의이다. 김일성이 소부대를 이끌고 회의장에 갈 때에 주위사람들이 만류했었다. 왜냐하면 김일성마저도 민생단에 가담했다 하고, 일본의 앞잡이라고, 체포하려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숲속의 회의장 주위를 데리고 간 자기 부대원들로 에워싸게 하고 회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교훈인가? 힘은 총대로부터 나온다는 교훈이 아닌가? 외교권보다 군 통수권이 없는 마당에 무슨 힘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결국 담판에서 중공당은 백기를 들고 말았고 민생단 사건은 종식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은 그 사건 자체보다는 중국과 북의 오늘의 위상 관계를 한 번에 파악하도록 만들고 끝까지 북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알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말 해 주는 것이 회고록이다. 기독교를 알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듯이 북한을 바로 알려면 회고록을 읽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 사회의 2030에 대한 가치관 문제와 회고록은 연동이 된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가 미국 제일주의로 갈라놓은 국론을 ‘애국심’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 2030은 민주화도 산업화도 아닌 자기만의 이익만이란 ‘me first’가 전부라고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의 비위에 맞는 정책 개발에 혈안이 돼 있다. 바이든이 ‘애국심’으로 국민 통합 카드를 들었다면 우리 2030 세대에겐 민족애란 화두를 던져야 하지 않을까?

박근혜 시절부터 ‘민족’이란 말이 이적행위가 돼 버렸고, ‘국민’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현실이다. 여당인 민주당도 이 프레임에 걸려 올가미에 갇혀있다. 이렇게 2030 세대가 지금과 같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뇌리 속에서 ‘민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민족사랑을 어떻게 진작 시키고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회고록은 여기서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이 땅에 피 뿌린 겨레 장병들의 영혼들의 숨소리들의 기록이다. 김일성은 자기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자기를 죽이려 한 극우 항일투쟁 명장 양세봉의 가족을 모두 북에 모시었고,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를 북의 여성 고위직에 임명한 것 등에 김구 선생도 막상 방북을 한 다음에야 알게 됐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 남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회고록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2030 세대가 우리 사회에 문제시 되고 있다. 김일성 회고록의 주인공들은 1020 세대들이었다. 김일성 자신과 유격대원들은 10대와 20대였다. 이을설과 전문섭은 당시 10대 초반의 나이였다. 1020 나이가 아니고는 만주벌 찬  바람 찬 서리를 견디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김일성을 바로 알게 하고 우리 안의 적대 관계와 오해를 불식하는 데도 회고록이 도움이 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김일성은 종파 공산주의자들과도 생사를 거는 싸움을 하였다. 그러나 남한 안에서는 김일성과 이들 극좌들과 구별할 줄 모른다. 회고록 만이 답이다. 어쩌면 반공의 대상은 이들 극좌 종파주의자들이다. 위에서 말 한 대로, 회고록 안에는 김일성이 이들과 싸우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조선의 별'이나 회고록을 처음 읽는 사람들마저도 혼란스러울 정도이다. 하루 속이 우리 안에서 극좌 종파주의자들과 김일성을 분간할 줄 아는 판단력이 생기기를 바란다. 아니 어쩌면 이를 고의적으로 분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회고록을 못 보고 못 읽게 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회고록은 미로迷路이다. 이 미로 속에 갇혀 못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이 회고록을 못 보게 하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마저 들게 한다. 이 미로를 탈출 하려고 하는 순간 국가보안법에 걸리고 마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 현실이다.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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