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칼럼] 언론의 중사에 걸린 '민초'와 2030

‘중사重思double thinking’ = “속이고 또 속이면 거짓이 참이 된다”는 기법.

김상일 승인 2021.05.23 09:09 | 최종 수정 2021.06.03 10:25 의견 0

선거 연령을 낮추자고 할 때에 지금의 여당인 민주당은 찬성, 그러나 야당인 국민의힘은 반대였다. 그러나 이번 서울, 부산 시장선거에서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론조사나 선거 후 관전평에 의하면 2030세대가 야당에 몰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여당의 2030인 초선 의원(민초)들도 당내 반대 세력으로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도 예측 못 했던 일이고, 사실인지는 정확히 진단할 수 없지만, 일자리와 젠더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월가를 점령한 세대들 그리고 지금 미얀마의 민주화를 주도하는 세대들은 모두 2030 세대들이다. 그러면 왜 한국에서만 이런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인가? 그 이유는 한국 근대사의 맥락을 짚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2030은 1990과 2000년대 생이다. 그런가 하면 소위 386세대란 1960년대 1980학번 나이 30세로서 당대의 2030이다. 한편 1940년과 1950년생들의 2030은 1960과 1970년생들일 것이다. 1990년과 2000년생들인 지금의 2030은 1987년 민주화 대전환기 이후의 생들로서 최루탄 연기로 눈물을 흘린 적도 없고, 춥고 배고픈 것을 겪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만끽하며 자랐다.

그런가 하면 다른 시대의 2030들은 일제, 한국전쟁, 보릿고개, 군부독제와 인권 탄압을 겪은 세대들이고, 항상 이들 세대들은 이런 역사의 사건들이 뇌리 속에서 기준점으로 푯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2030은 이런 기준점과 푯대 자체가 뇌리 속에 성립돼 있지 않은 세대들이다. 어차피 이 땅의 역사와 삶을 살아 갈 세대들이다. 이들에 대해 시시비비 가치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왜 그런가 하는 진단은 바로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2030의 아이콘이 윤석열이고 지지정당이 국민의힘이라면? 옳고 그른가를 떠나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고 진단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민주화와 산업화는 세레나데가 되었고, 우리나라 지도는 38 이남이고, 북한은 아예 남의 나라이고, ‘민족’이란 말은 이들의 사전엔 아예 없다면 하고, 선거 이후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2030세대들은 어떻게 어떤 가치관이 형성돼 있을까? 이들에게 가치관 성립의 과정은 아예 다른 세대들과는 다른 ‘가상공간’ 혹은 사이버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이런 세대들은 조지 오웰의 『1984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1984년 영사英社라는 사회의 태형Big Brother은 고도의 논리적 기법 즉, '중사重思double thinking'를 사용한다.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맹으로, 어제의 선을 오늘의 악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도입된 기법 말이다.

‘중사’란 쉽게 말해서 사람을 “속이고 또 속이면 거짓이 참이 된다”는 기법이다. 다른 2030세대들은 이렇게 쉽게 중사에 걸리지 않는다. 친일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민족과 국민 성원들은 일제의 만행을 있지 않고 있으며, 박정희의 인권 유린을 잊지 않고 있다. 중사란 다름 아닌 태형이 억압을 자유로, 전쟁을 평화라고 둔갑시킬 수 있는 정치 기술인 것이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김학의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원주 별장 성접대 의혹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눈동자만 보아도 열의 아홉은 그것이 ‘김학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김학의를 불기소 무혐의 처리를 했으며, 그가 가면을 하고 공항을 빠져 나가는 것을 막고 잡은 검사들을 지금 검찰이 기소를 하고 있다. 사법정의를 세우라고 만든 공수처가 그 사건 1호로 교육감으로 정했다.

그런데도 야당인 국민의힘이 서울, 부산을 압권 했고, 윤석열을 대선 후로 1, 2위를 점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중사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거짓을 다시 거짓”이라고 하면 그 사이에서 인간 두뇌는 자기를 세뇌시켜 “참”이라고 믿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를 낳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 세뇌 당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의 대전환점에서 이런 중사 현상은 비일비재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 윤석열 조부 산소의 오물 사건만 하여도 조선일보가 가짜뉴스를 보도하자, 중앙일보가 그것이 가짜라고 보도함으로 마치 진실의 전도사인 것처럼 자처하는 것이라든지, 지난 선거 내내 이들 신문들이 한 보도 행태는 거의 모두의 중사 기법이었다.

가장 깨어 있어야 할 여당 초선 의원들, 그리고 조국을 두고 검찰과 야당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간 여당 중진 의원들, 이들마저 중사에 걸려들었다 할 수 있다. 2030, 이들이 쉽게 중사에 세뇌 당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사이버 세계에 익숙하고 역사의 한 시점에 대한 기준과 푯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없다. 태생적 한계이다. 중사에 걸리기에 좋은 세대가 지금의 2030이다.

‘깨시민’! 중사란 원래 불교에서 참 깨달음을 할 때 하던 기법이다. ‘꿈에서 꿈이라고’ 중사를 하게 되면 그것은 ‘깸’인 것이다. 깨달은 자는 꿈속에서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중사의 제 모습인 것이다. 조지 오웰이 『1984년』을 쓸 당시에 불교국가 버마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에서 이 말을 가져와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에 적용해 사용했던 것이다. ‘어리석다’ 혹은 ‘철없다’고 하는 말은 원래 중사를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 2030세대가 나쁜 의미에 중사에 걸려 있다면 걱정이다. 앞으로 열 달 안에 대선이 있다. 그때까지 조중동 언론이 가짜에 가짜 뉴스를 쏟아 낼 때에 이것을 참이라고 착각에 걸려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 한다면, 그리고 이들이 대세를 좌우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촛불을 든 “깨시민”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조중동이 걸어 놓은 중사에 깨시민들만이 깨어날 수 있다. 2030이 윤석열을 아이콘으로 여겨서 국민의힘에 희망을 건다면 이것은 조중동이 건 나쁜 중사에 함몰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부동산 값을 올려놓은 것이 사실은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고, 부동산 투기를 한 후보가 오세훈이고 박형준인데 부동산 정책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반대하고 이들에게 몰표를 던진 것이 정말 2030인가? 정말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중사에 우리 미래 2030이 중사 당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소돔고모라 성에서 의인만 투표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의인은 고작 15명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의인도 악인도 모두 함께 투표장에 간다. 그러면 그 성의 운명은 선거로 결판난 것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대선이 겨우 열 달 정도 남겨 놓고 있다. 조중동 등 전 언론이 2030을 향해 전방위 세대를 상대로 중사를 걸고 있다. 거짓말을 또 거짓말이라고 하니, 참 그 말 옳네 하고 투표장에 간다면 이 나라는 거덜나고 말 것이고 통일은 요원해 질 것이다. 이들이 깨시민인지 감정하는 방법은 한반도 지도를 놓고 우리의 조국이 어디냐 하고 물어 보면 당장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조중동이 아닌 일본 같은 나쁜 외세가 2030을 향해 중사를 건다고 해보자. 구한 말 2030가 아닌 이완용같은 지도급들이 일본의 중사에 걸려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태국만이 중사에 걸리지 않았다. 현명한 국왕 때문이라고 한다. 여당 초선 의원이 지금 심각한 중사에 걸려 있는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조중동의 중사에 걸린 무리의 인간들 가운데는 일제가 좋았어, 일제 때문에 근대화도 되고, 라고 식민지 근대화를 합리화 하고 있다.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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