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04) 집안 어른들, 목압서사 연빙재에서 1박2일

대구 숙모님과 고모님들 오시고
전주 고종사촌 형님 내외분 오셔
3년 만에 어른들 필자의 집 방문

조해훈 기자 승인 2022.05.23 23:33 | 최종 수정 2022.05.26 11:42 의견 0

집안 어른들께서 1박 2일로 오시는 날이다. 5월 14일이다. 마침 부경대 전 강남주 총장님께서도 하동에 오시어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장터 안에 있는 식당 ‘대청마루’에서 집안 어른들께서 점심을 드시도록 예약을 했다. 청국장으로 유명한 식당이다.

(왼쪽부터) 필자와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님, 차용범 전 경성대 교수, 박흥주 부산문화 대표가 하동읍 만지에 있는 섬진강횟집 앞에서 기념찰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남호 시인
(왼쪽부터) 필자와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님, 차용범 전 경성대 교수, 박흥주 부산문화 대표가 하동읍 만지에 있는 섬진강횟집 앞에서 기념찰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남호 시인

그런 다음 필자는 강 전 총장님과 점심 식사를 하기로 예약이 돼 있는 하동읍 만지에 있는 섬진강횟집 식당으로 갔다. 몇 년 전에 동아대와 하동문화원의 MOU 체결 후 이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강 전 총장님과 언론계 선배이자 경성대 교수를 지낸 차용범 선생님, 그리고 부산문화회 박흥주 사장님이 먼저 도착하시어 식당 앞에 서 계셨다. 인사를 한 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하동읍에서 시를 쓰고 문학평론을 하는 김남호 선생과 이병주문학관 및 박경리문학관장을 하고 있는 최형욱 시인 등도 오셨다. 함께 참게가리장을 먹었다.

식사 후 필자는 집안 어른들 때문에 집으로 와야 했지만 강 전 총장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은 모두 악양의 ‘최참판댁’으로 가셨다. 그곳서 아마 문학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어른들께서 차산으로 올라가기 전 필자의 집인 목압서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첫 번째가 필자. 사진=목압서사 제공
어른들께서 차산으로 올라가기 전 필자의 집인 목압서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첫 번째가 필자. 사진=목압서사 제공

필자는 화개장터로 차를 몰아 장터 앞에서 집안 어른들을 만나 집으로 안내했다. 필자의 집 아래채인 ‘연빙재(淵氷齋)’에 어른들은 짐을 푸셨다. 어른들은 “집 입구를 바꾸었고, 돌로 담장을 다시 쌓고 손을 많이 보았네.”라며, 집을 둘러보셨다.

필자의 고향인 대구 달성 논공에 사시다 달성군청 앞 옥포의 LH아파트에 사시는 숙모님과 대구에 사시는 조점화 고모님 및 고모님의 딸 연희, 그리고 막내 조순덕 고모님과 고모부, 전북 전주에서 필자의 고종사촌 배정지 형님 내외분이 오셨다. 배정지 형님은 필자의 큰 고모님의 막내아들이다. 어른들은 필자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며, 떡을 비롯해 여러 음식을 준비해 오셨다.

 

고모님들과 배정지 형님은 60년 만의 해후라고 했다. 배정지 형님은 전북 군산에서 그곳 출신인 형수님과 결혼하시어 지금까지 전북에서 사시다보니 대구에 사시는 고모님들과 만남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형님은 고

차산에서 찻잎과 고사리를 따시는 형수님. 사진=조해훈
차산에서 찻잎과 고사리를 따시는 형수님. 사진=조해훈

향인 갈실의 문중 산소에도 필자와 함께 간 적이 있는데, 그때는 고모님들과 만나지 못하셨다. 그렇다보니 서로 하실 말들이 많은 듯 어른들은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필자는 계속 녹차와 발효차를 우려 대접했다. 어른들은 모두 차를 좋아하시어 계속 차를 드셨다. 그렇게 쉬시다 차산으로 올라가시기로 했다. 연세가 83세인 배정지 형님만 남아 쉬시기로 하고, 다른 분들은 필자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가파르고 험한 곳이 몇 군데 있어 올라가는데 모두 고생하셨다. 점화 고모님은 힘이 들어 결국 아래 차밭에서 멈추셨다.

차산에서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 앞에서부터 형수님, 순덕 고모님, 점화 고모님, 연희.
차산에서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 앞에서부터 형수님, 순덕 고모님, 점화 고모님, 연희.

다른 분들은 고사리도 꺾고 찻잎도 따셨다. 산이 가팔라 필자도 힘든데 어른들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고사리와 찻잎을 땄다. 필자는 낫으로 차밭의 풀을 베었다.

산이 가파르고 길이 좁아 하산하는 것도 어른들께는 쉽지 않았다. 마을길로 내려오니 고추밭을 가꾸는 윤도현 어른의 사모님께서 고추밭 위 곤드레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일을 하시다 허리를 펴고 서서 고모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다.

차산에서 내려와 마을길로 접어들면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필자, 숙모님, 순덕 고모님. 사진=조해훈
차산에서 내려와 마을길로 접어들면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필자, 숙모님, 순덕 고모님. 사진=조해훈

고모부께서 산에서 늦게 내려오셨다. 내려오시다 미끄러져 허리를 다치셨다. 고모부께서 “파스 있어?”라고 물으시어, 파스와 타박상에 바르는 약을 찾아 드렸다. 숙모님과 고모님들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하셨다.

준비해 오신 게 많아 상차림이 푸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미시면서 또 이야기는 이어졌다. 배정지 형님은 “작은 딸 사위가 경기도 안양에 정신과 의원 개업을 했는데 생각보다 찾는 환자가 많다. 형님은 연세가 많으시다보니 요즘 치매 증세가 좀 있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정지 형님 위로 수원에 사시는 창립 형님과 대구에 사시는 청자 누님이 계신다. 점화 고모님은 “아들이 아직 개업은 하지 않고 부산의 모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라며, 소식을 전하셨다. 연희 신랑은 최근에 경북 청도에 땅을 구해 약초를 심어 가꾸고 있다고 했다. 연희네는 대구에서 한약업을 하고 있다.

아래채 연빙재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찍은 사진. 사진=목압서사 제공
아래채 연빙재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찍은 사진. 사진=목압서사 제공

배정지 형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어 얼굴도 모르는데다 4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 갔다 와 회사를 다니다 형님(배창립) 소개로 군산의 미군부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결혼도 하고 사업을 확장해 돈을 벌었다.”라며, 살아온 과정을 쭉 이야기 하셨다. 필자도 늦게까지 어른들의 대화를 듣다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본채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저녁 식사 후 과일과 차를 마시는 배정지 형님, 순덕 고모님, 형수님(오른쪽부터), 사진=조해훈
저녁 식사 후 과일과 차를 마시는 배정지 형님, 순덕 고모님, 형수님(오른쪽부터), 사진=조해훈

다음날 아침인 15일에 일찍 일어나신 어른들은 쌍계사에 산책을 다녀오시기도 하고 다시 차산에 올라가시어 고사리 등을 꺾어 오시기도 했다.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차를 마시며 쉬시다 오전 11시 넘어 화개장터 앞으로 내려가 다우찻집에 갔다. 배정지 형님이 헤어지기 전에 차를 한 잔 사시겠다고 했다. 필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다른 분들은 아이스크림과 다른 음료를 주문해 마셨다. 차를 마시며 한 시간 가량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대구에서 오신 분들이 먼저 출발하시고, 전주에서 오신 형님 내외분도 출발하셨다.

1박 2일로 필자의 집을 방문한 집안 어른들께서 헤어지기 전 화개장터 앞 다우찻집에서 차와 아이스크림 등을 드시는 모습. 사진=조해훈
1박 2일로 필자의 집을 방문한 집안 어른들께서 헤어지기 전 화개장터 앞 다우찻집에서 차와 아이스크림 등을 드시는 모습. 사진=조해훈

필자는 “편하게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제 집에서 만나도록 합시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2019년 6월에 집안 어른들이 오시고 3년 만에 다시 필자의 집에 오신 것이다. 그때 배정지 형님 내외분은 오시지 않았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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