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123) 6년가량 독락당에 은거한 회재 이언적

김안로 복귀 반대해 벼슬서 물러나
고향 양동마을 인근에 독락당 은거
「임거십오영」 창작, 후인들 차운해

조해훈 기자 승인 2022.11.28 12:25 | 최종 수정 2022.12.01 18:53 의견 0

새가 숲 근처서 우니 즐겁게 들리고(喜聞幽鳥傍林啼·희문유조방림제)

새로 지은 초가 정자는 실개울을 내려 보네.(新構茅簷壓小溪·신구모첨압소계)

그저 밝은 달 짝을 삼아 혼자 술 마시며(獨酌只邀明月伴·독작지요명월반)

한 칸 집에서 흰 구름과 더불어 산다네.(一間聊共白雲棲·일간료공백운서)

위 시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溪亭(계정)’이다. ‘독락(獨樂)’의 공간에서 달과 구름을 짝하여 함께 살아가는 ‘은자(隱者)’의 모습을 담았다.

이언적이 40대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독락당. 사진=조해훈
이언적이 40대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독락당. 사진=조해훈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가면 옥산서원이 있고, 그 인근에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독락당은 조선 5현(朝鮮五賢)의 한 사람인 이언적이 물러나 살던 공간이며, 옥산서원은 그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공간이다. 그는 독락당서 6년가량 은거했다. 독락은 『예기(禮記)』의 “홀로 그 뜻을 즐거워하여 그 도를 지겨워하지 않는다.(獨樂其志而不厭其道)”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이언적은 경주시 강동면 양좌동(현 양동마을)에서 생원인 아버지 이번과 어머니 경주 손 씨 사이에서 출생해 외숙인 손중돈에게 글을 배웠다. 24세인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벼슬길이 순탄하던 그가 41세 때인 1530년 파직돼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그는 낙향한 이듬해인 1531년 양좌동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자옥산(紫玉山) 아래 개울가에 강학을 위한 집 10여 칸을 지었다. 독락당이다.

이언적이 독락당에 은거하던 1535년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을 지었다. 15수 연작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이언적의 대표작으로, 그의 문집인 『회재집』 24권에 수록돼 있다. 「임거십오영」 15수는 「早春(조춘)」·「暮春(모춘)」·「初夏(초하)」·「秋聲(추성)」·「初冬(초동)」·「悶旱(민한)」·「喜雨(희우)」·「感物(감물)」·「無爲(무위)」·「觀物(관물)」·「溪亭(계정)」·「獨樂(독락)」·「觀心(관심)」·「存養(존양)」·「秋葵(추규)」이다.

퇴계 이황은 1560년 이 시에 차운한 작품을 지었다. 「임거십오영」은 이황 이후에도 신지제·권필·이희조·채팽윤·박태무·조의양·정충필·이야순·이재영 등이 차운하였다.

독락당 인근에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는 옥산서원. 사진=조해훈
독락당 인근에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는 옥산서원. 사진=조해훈

이언적은 주자(朱子)가 서재에 머물면서 노래한 것을 변용하여 숲속에서 은자와 학자, 충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임거십오영」에 담은 것이다. 즉 산림에 물러나 사는 학자의 삶을 노래하는 전형을 만들었다. 박장원(朴長遠·1612~1671)은 그의 문집인 『久堂集(구당집)』에서 「箚錄(찰록)」이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동방의 유생 중에 회재의 문집이 있는 줄 아는 자가 있는가? 저술은 이 노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에 참맛이 있으니 극히 아름다운 작품이다. 「임거십오영」은 퇴계가 손수 필사해놓고 완미하면서 ‘그 흉중에 흘러나오는 것을 상상함에 누가 이에 미칠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탄복하며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我東儒生有知晦老文集者耶, 所著自此老始. 詩有眞味, 極有佳作, 如林居十五絶句, 是退翁手寫表出者也, 玩而味之, 想其流出胸中, 誰有及之者, 敬服無斁)

조선 학자의 작품 중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시는 흔하지 않다.

이언적의 고향인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마을 전경. 사진=조해훈
이언적의 고향인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마을 전경. 사진=조해훈

그러면 이언적은 어떤 연유로 벼슬에서 파직되었을까? 그는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이 되면서 정쟁에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듬해 채무택이 귀양가있던 권신 김안로의 복귀를 주장하자 대부분의 조정 관료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이언적은 김안로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그의 처신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반대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언적은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고, 탄핵이 끊이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는 시 「징심대에서(澄心臺卽景)」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징심대에서 객은 돌아갈 것 잊었는데(臺上客忘返·대상객망반)/ 바위틈에 달은 몇 번 차고 기울었나?(巖邊月幾圓·암변월기원)/ 개울 깊어 물고기는 맑은 물에서 장난치고(澗深魚戱鏡·윤심어희경)/ 산이 어둑하니 새는 안개 속에서 흐릿하네.(山暝鳥迷烟·산명조미연)/ 사물과 내가 혼연히 하나가 되었으니(物我渾同體·물아혼동체)/ 나아가고 물러남은 그저 천명을 즐길 뿐.(行藏只樂天·행장지락천)/ 천천히 거닐며 그윽한 흥을 부치니(逍遙寄幽興·소요기유흥)/ 이 마음의 땅이 절로 유유하구나.(心境自悠然·심경자유연)

그는 또 시 ‘독락’에서 “홀로 사니 누가 함께 시를 읊조리랴마는(離群誰與共吟壇·이군수여공음단)/ 산새와 물고기가 나의 낯을 익히 안다네.(巖鳥溪魚慣我顔·암조계어관아언)”라 한 것처럼 산새와 물고기를 벗하며 은거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언적은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주부윤과 이조·형조·예조 판서, 경상도관찰사, 의정부 우찬성·좌찬성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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