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23) 목압서사 2022년 12월 인문학 특강

주제 ‘다산 정약용의 차(茶) 이야기’
조해훈 원장 직접 마지막 강의 나서
조선후기 다산에 의해 차 문화 중흥 ,

조해훈 기자 승인 2022.12.31 19:10 | 최종 수정 2023.01.04 13:28 의견 0

목압서사(원장 조해훈)가 매달 공개적으로 열고 있는 인문학 특강이 2022년 마지막 회로 12월 30일 오후 6시30분 서사 내 연빙재에서 열렸다.

주제는 ‘다산 정약용의 차(茶) 이야기’로, 조해훈 서사 원장이 직접 강의를 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조 원장은 “한 해의 끝에 실시하는 특강이어서 편한 주제를 선정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차의 본향으로 알려져 있는 화개차(花開茶)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어,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차계에 중흥을 이뤘던 다산 정약용과 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참고로 강의 내용은 조선후기의 차 문화사를 정리한 정민 한양대 교수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다.”고 말했다.

필자와 강의를 듣고 있는 주민들. 사진=목압서사 제공
필자와 강의를 듣고 있는 주민들. [사진=목압서사 제공]

 

조 원장의 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기까지 융성했던 우리의 차 문화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사찰 등에서는 일부 차맥이 이어져 오고 있긴 했다. 차의 생산량 자체가 적고 공납(貢納) 외에는 별다른 수요가 없었다. 또한 우리 차와 관련해 이렇다 할 차 관련 이론서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이 1805년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에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그곳 승려 아암 혜장과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후 다산은 백련사로부터 차를 얻어 마시다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면 차를 자급자족하였다.

다산이 1815년에 호의 스님에게 떡차 10개를, 1816년에 우이도로 떡차 50개를 보낸 내용의 편지가 친필로 남아있다. 다산이 해배 돼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과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맺었다. 여기에 보면 제자들과 합심하여 찻잎을 따서 덖고, 노동력이 부족할 경우 수고비를 주어 동네 아이들의 노동력을 빌려 찻잎을 따오게 한 평소 정황이 짐작된다. 또 여기에는 곡우날 어린 차를 따서 잎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든다고 했다.

다산이 마셨던 차는 떡차였다. 다산이 1830년 다산이 백운동 별서에 사는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삼증삼쇄(三蒸三曬)해 떡차를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나온다. 다산은 유배 이전에 지은 시에서 이미 차의 독한 성질을 눅게 하려고 구증구포(九蒸九曝)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산은 차의 독성을 눅여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게끔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떡차 제조법을 개발한 것이다.

12월 인문학 특강 모습. 사진=목압서사 제공
12월 인문학 특강 [사진=목압서사 제공]

초의가 24세 때인 1809년에 다산초당을 처음 찾아 다산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다산은 48세였다. 초의가 다산초당을 드나들 당시, 다산은 이미 차를 만들고 있었으므로 그 제법이 초의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다산의 제다법은 강진은 물론 장흥 등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초의는 1830년에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보림백모라는 떡차를 예물로 준비해 상경했다. 이 차의 맛을 본 박영보가 시 「남차병서」를 지었고, 그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그 차 맛을 격찬하자 초의의 명성이 경향 각지에 알려졌다. 이후에도 몇 차례 차를 갖고 상경했다.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의 요청에 의해 초의가 『동다송』을 지었다. 이로 인해 우리 차는 이론 방면에서도 깊이를 갖추게 된 것이다. 초의는 이 한 편의 장시에서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능, 그리고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그전인 1828년 초의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소재 칠불사에 갔다가 그곳 승려들이 탕국 끓이듯이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을 보고 『만보전서』에 있는 제다 내용인 『다신전』을 베낀 적이 있다.

초의차는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녹차와 같지는 않다. 일부 잎차를 만들기는 했어도, 이 또한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차와는 전혀 다르다. 끓이는 방법도 덩이차를 맷돌에 갈아 잘게 가루를 내어 뜨거운 물에 함께 끓여 마시는 방식이었지, 지금처럼 우려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초의차가 경향 각지에 유명해진 데는 누구보다 추사 김정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추사는 24세 때 연행에 참석하여 완원의 태화쌍비지관을 방문해 융단승설차를 맛보았다. 그는 이 차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러다 초의차를 맛본 그는 이 차에 깊이 매료됐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에서 차 이야기를 빼고는 남는 내용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필자가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목압서사 제공
강의하는 필자 [사진=목압서사 제공]

초의차에 대한 관심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최근 공개된 초의가 받은 여러 편지들을 보면 초의는 서울뿐 아니라 해남 인근의 벼슬아치와 아전들에게까지 끊임없는 차 요구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산은 해배돼 경기도 남양주 마재로 돌아간 이후에도 제자인 이시헌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다산의 큰 아들인 정학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보내준 차를 잘 받았다는 내용이 있고, 둘째인 정학유는 자신이 먹는 차의 양이 1년에 수십 근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산이 세상을 버리고, 추사와 초의가 차례대로 세상을 뜬 후 차의 열풍이 가라앉는다. 물론 지리산과 인근 지역에서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아주 드물게 차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조 원장은 “최근에 정민 교수에 의해 그동안 다산의 저작으로 알려진 『동다기(東茶記)』가 발굴돼 이 글을 쓴 이덕리(李德履)라는 사람도 새롭게 밝혀졌다. 이덕리의 문집인 『강심(江心)』에 「기다(記茶)」로 기록돼 있다. 이 책을 다산의 제자이자 차를 만들어 공급해준 백운동의 이시헌이 필사했다. 백운동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최초로 우리 차를 상품화한 이한영의 백운옥판차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고 강의를 마무리지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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