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106) 세상일에서 벗어나 평생 은일한 서경덕

황진이의 유혹 물리친 일화 전해져
10세 무오사화, 16세 갑자사화 목도
도(道) 실행할 수 없어 출사 접고 은거

조해훈 기자 승인 2023.02.23 12:14 | 최종 수정 2023.02.27 11:23 의견 0

성 밖에 사니 속된 일 없고(郭外無塵事·곽외무진사)
산 빛 짙은 창 아래 늦게 일어나네.(山窓睡起遲·산창수기지)
봄 맞으러 골짜기 시냇가 거닐면서(探春行潤壑·탐춘행윤학)
예쁜 꽃가지 꺾어들고 바라보네.(看取好花枝·간취호화지)

위 시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시 「봄날에(春日·춘일)」로, 그의 문집인 『화담집(花潭集)』에 실려 있다.

속세를 벗어나 자연에 묻혀 사는 화담의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사화(士禍)가 계속되던 때였다. 그러한 시대 속에서 산림에 묻혀 지내는 은일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봄 맞으러 시냇가를 거닐면서 꽃가지 꺾어들고 바라보는 모습은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는 은자(隱者)의 전형적인 삶이다.

화담 서경덕 초상. 출처=철학사전
화담 서경덕 초상. 출처=철학사전

화담은 본관이 당성(唐城)으로, 호는 화담(花潭)·복재(復齋)다. 그는 1489년(성종 20)에 아버지인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과 어머니는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나, 1546년(명종 원년) 58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가 살던 시기는 4대 사화가 연이어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됐다. 그러다보니 뜻 있는 선비들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고, 산림에 묻혀 도학과 덕행을 추구했다. 개성 화담에 묻혀 일생을 학문에 전념한 그는 중국 송학(宋學) 중 기론(氣論) 계열의 학설을 연구했으며,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하여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1519년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15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서경덕의 문집인 '화담집'.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경덕의 문집인 '화담집'.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집안 형편이 곤궁했음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도마질 소리를 들으며(聞鼓刀·문고도)」인데, 한 번 보도록 하겠다.

“새가 새벽부터 와서 도마질을 하라는데(有鳥凌晨勸鼓刀·유조릉신권고도)/ 칼질은 부엌에서 음식 만들 때나 하는 것이지.(鼓刀應在割烹庖·고도응재할팽포)/ 근년 들어 상 위에 소금 없어진 지도 오래인데(年年盤上無鹽久·연년반상무염구)/ 어쩌자고 초가집 앞에서 울어대느냐.(莫向茅齋苦叫號·막향모재고규호)”

소금에 간을 한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의 가난한 삶을 살았음을 증명해준다. 그토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출사하여 입신양명할 뜻을 세우지 않았다.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으로 43세에 치른 과거마저 사마시에만 합격했을 뿐 대과에는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제학 김안국의 천거로 제수 받은 후릉참봉마저 상소를 올려 사양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10세에 이미 무오사화를 목도하였고, 16세에 다시 갑자사화를 만나게 된다. 아울러 훈구 대신과 사림의 대립에 이어 연산군의 포악한 옥사를 접하면서 도(道)가 실행될 수 없는 시대에 출사에 대해 그가 회의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덕의 글씨.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경덕의 글씨.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 시를 보면 화담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공부하던 그땐 천하경륜에 뜻을 두었지만(讀書當日志經綸독서당일지경륜)/ 나이 들어서는 오리혀 안자의 안빈낙도가 달갑네.(歲暮還堪顔氏貧·세모환감안씨빈)/ 부귀는 다툼이 있으니 손대기 어렵지만(富貴有爭難下手·부귀유쟁난하수)/ 자연은 금함이 없으니 내 몸을 편히 할 수 있네.(林泉無禁可安身·임천무금가안신)/ 산나물 캐고 물고기 잡으면 배 채우기 충분하고(採山釣水堪充腹·채산조수감충복)/ 달과 바람을 노래하니 마음이 족히 펼쳐지네.(詠月吟風足暢神·영월음풍족창신)/ 학문에 의혹이 없어 시원스레 트임을 아니(學到不疑知快闊·학도불의지쾌활)/ 허망한 한 평생은 면하게 되었노라.(免敎虛作百年人·면교허작백년인)

독서의 즐거움과 안빈낙도하는 삶을 노래한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경륜할 뜻을 품고 공부했다. 하지만 모진 세상을 겪다보니 명리와 부귀의 허망함을 깨닫고 독서와 함께 안빈낙도하는 삶의 즐거움을 택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아예 입신양명의 상념조차 없애고, 자연에 한 몸을 의탁하는 선비로 은일하게 된 것이다.

1930년에 촬영된 개성의 숭상서원.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0년에 촬영된 개성의 숭양서원.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국 기철학(氣哲學)의 학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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