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선비정신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 ... 목압서사 10월 인문학 특강 성료

조해훈 원장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 강의

조송현 기자 승인 2022.11.02 13:33 | 최종 수정 2022.11.03 10:23 의견 0
목압서사 10월 강의 모습. 사진=목압서사 제공
목압서사 10월 특강 [사진 = 목압서사 제공]

경남 하동군 화개면 맥전길42(목압마을)에 위치한 목압서사(원장 조해훈)는 2022년 10월 28일 오후 6시30분부터 1시간여 동안 서사 내 연빙재에서 인문학특강을 가졌다.

이날 특강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주제로 조해훈(교육학박사) 원장이 직접 진행했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 대부분 이뤄지는 인문학 특강은 외부 강사를 초청해 실시하지만 조 원장이 직접 강의를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8월 1일~10월 30일 목압서사 내 목압고서박물관과 목압문학박물관이 공동으로 ‘선비들의 삶’을 주제로 관련된 단행본 100권으로 전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 원장은 강의를 시작하면서 “선비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선비정신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라고 참석자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참석자들이 각자 나름의 생각을 말했다.

조 원장은 “조선시대에 선비란 나라의 기둥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말한다.”며 “그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유지하는 정신적·문화적인, 그리고 정치가이자 관료로서의 영역을 담당했던 층이다.”고 말했다.

조 원장은 또 “조선 초기 세종대에 나라의 전체적인 뼈대 또는 틀을 만들기 위해 정치·경제·사회·법률·문화 등 각종 관련 서적을 발행했는데, 그 때 집현전 학자들이 그 역할을 거의 수행했다. 한글창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이 선비이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조선 말기 일본이 조선을 침탈할 때 등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경우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해 항거를 하던 의병장들이 대부분 선비였다.”라고 말했다.

조해훈 원장이 목압서사 10월 인문학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목압서사 제공
조해훈 원장이 목압서사 10월 인문학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 목압서사 제공]

한 참석자가 “그러면 선비들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기꺼이 목숨을 던졌던 사람들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 원장은 “그렇다. 실례로 일제에 의해 나라가 빼앗겼을 때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黃玹) 선생이 그런 분이다. 그 분은 ‘선비는 나라를 위해 당연히 목숨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선비의 목숨은 나라의 것이라는 이야기이다.”라고 강의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조 원장은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문사로 병자호란 때 강화에 피신했던 윤선거(尹宣擧)는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이씨가 자결하였으나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당시 김상용과 김익겸 등은 ‘청나라 군사들의 손에 잡혀 죽느니 스스로 죽는 것이 의리에 맞다’며 분신 자결했다. 윤선거는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선비로서 대의를 지켜 순절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여러분이 윤선거였다면 어떻게 행동하였겠느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 원장은 성호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에서 ‘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했다며 소개했다.

“선비는 늘 가난한 법이다. …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에는 마음가짐이 잘못된 데로 빠질 뿐만 아니라, 또 글 읽는 사람으로서 병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부당하게 얻은 재물로 말하면, 내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재물을 가졌다가는 반드시 재앙이 뒤따르니, 이것이 이른바 ‘간부(姦富)’, 즉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니 선비가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 원장은 “성호 이익이 말했다시피 자신의 뜻을 지키는 것은 원래 어렵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꿋꿋하게 지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결국은 선비가 원래 가난한 법이라는 사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성호 이익이 주장한 선비가 참아야 할 여섯 가지를 소개했다. 조 원장은 “이익은 선비라면 굶주림을 참아야 하고, 추위를 참아야 하고, 수고로움을 참아야 하고, 곤궁함을 참아야 하고, 노여움을 참아야 하고, 부러움을 참아야 한다. 이것을 참아서 편안하게 여기는 경지에 이른다면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속으로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이익은 농민들처럼 쌀이나 곡식을 생산하지 않는 글만 읽는 사람이라 여겨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서 실컷 먹으려고만 한다면 벌레나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 자책했다. 그리하여 하루에 두 끼씩만 먹었으며, 매 끼니 때마다 쌀 한 홉씩을 덜었고, 또 콩죽으로 대신 먹는 경우도 많았다.”라고 소개했다.

조 원장이 이날 준비한 강의노트는 A4용지로 10장이었다. 그는 선비가 되는 길인 과거와 조선시대의 4대 사화를 비롯한 당쟁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물론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산림에 묻혀 후학을 양성하거나 저술활동을 하는 선비와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아가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선비로 나눠 설명했다. 이익의 경우는 전자이다.

강의 후 목압서사 연빙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목압서사 제공
강의 후 목압서사 연빙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 목압서사 제공]

조 원장은 또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기로소(耆老所)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선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신위(神位)인 불천위(不遷位)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그는 “결국 선비는 ‘의(義)’와 ‘청렴(淸廉)’을 목숨처럼 여기던 계층으로 정의할 수 있다.”며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선비가 되는 길에서부터 세상에서의 역할, 그리고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야기, 죽어 불천위가 된 선비 등 선비들의 다양한 삶에 대한 내용을 짧은 시간에 축약해 강의를 했다. 특강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조 원장님의 강의를 통해 선비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됐다.”며, 박수로 호응했다.

한편 목압서사는 마을주민들과 함께 공부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마을서당으로 2017년 개원했다.

<pinepines@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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