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111) 18세기 청나라에 알려졌던 시집인 『한객건연집』과 저자들

유금, 淸나라 가져가 이조원·반정균 평 받아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시 초록해 간행
​​​​​​​당시 조선·중국에 널리 알려져 사본 많은 책

조해훈 기자 승인 2024.01.10 13:12 | 최종 수정 2024.01.10 16:10 의견 0
목압서사가 소장 중인 ‘한객건연집’ 표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은 1776년(영조 52)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작은아버지 유금(柳琴·1741~1788)이 연행(燕行) 길에 가지고 가서 홍대용을 통하여 이미 문학적 교류가 있었던 청나라 문인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의 글을 얹어 1777년 중국에서 간행하였다. 필사본이다.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로 불리는 이덕무(李德懋·1741~1793), 유득공, 박제가(朴齊家·1750~1805), 이서구(李書九·1754~1825)의 시를 초록하여 간행한 시집이며, 4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객(韓客)’은 삼한(三韓) 사람이라는 의미로 저자들이 조선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건연(巾衍)’은 수건 같은 것을 넣는 조그만 상자를 말한다. ‘건연집(巾衍集)’은 소형의 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한객건연집』이란 조선 사람의 시를 담은 조그만 시집이라는 의미이다.

개인시집이 아니고 네 사람의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뒤에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객건연집 서문- 이조원과 반정균의 서문2

맨 앞에는 이조원과 반정균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이어서 권1에는 이덕무의 시 74제 99수, 권2에는 유득공의 시 49제 100수, 권3에는 박제가의 시 59제 98수, 권4에는 이서구의 시 75제 92수가 실려 있다. 당시 네 사람의 나이는 이덕무가 36세, 유득공이 29세, 박제가가 27세, 이서구가 23세였다.

한객건연집 내지의 이덕무 시

이덕무는 「증인지임금교찰방(贈人之任金郊察訪)」이라는 시에서 늘그막에 벼슬길에 나서는 노인과 모여서 웃고 있는 소년을 대비시켜 묘사하였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휘날리는 살구꽃 속에 뽐내며 날뛰는 말들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시를 읽고 중국인 이조원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평하였다. 그의 시의 소재는 조선의 산천자연, 자기의 생활주변에서 가려 다분히 감각적으로 읊었다. 이덕무는 서자여서 크게 중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서장관·규장각검서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관독일기』·『편찬잡고』·『청비록』 등을 저술한 학자였다.

한객건연집 내지의 유득공 시

『발해고(渤海考)』를 지은 유득공은 역사의식이 강한 시인이다.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그의 역사의식을 잘 나타낸다. 그는 민족의 역사를 읊고 외우기 쉬운 시 형식을 빌어서 고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의 자연이야말로 시의 참된 소재임을 인식하고 조선의 자연과 풍물을 시로 읊었다. 널뛰는 모습, 그네 타는 모습을 한 폭의 풍속도를 보듯 그려나갔다. 그의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반정균으로부터 재기종횡(才氣縱橫·재주와 기백이 활발함), 재정부유(才情富有·재주가 많음)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1779년부터 13년간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며 왕명으로 많은 책을 교정·간행했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그 이전부터 청나라 문사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청나라에 총 4번 다녀왔으며, 『북학의』·『정유집』·『정유시고』 등을 펴냈다.

이서구는 나이가 가장 어렸으나 비교적 중후한 맛이 있는 시를 썼다. 이서구를 제외한 셋은 서출이어서 관로가 널리 트이지 못하였다. 그래서 학문·예술의 세계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공통적으로 답습·진부를 싫어하고 독창·참신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사가시는 실학사상 위에 핀 꽃이라 하겠다. 이서구는 후일 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객건연집』에는 이들 네 사람의 젊은 날 생동했던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조원과 반정균이 서문을 썼다. 각 권마다 앞에 저자의 약력이 기재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이조원과 반정균이 평한 글이 붙어 있다. 각권 끝에는 이조원의 총평(總評)과 반정균의 발미(跋尾)가 붙어 있다. 저자의 약전과 시 곳곳에 달린 상세한 주석들은 이 책이 애초에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객건연집』은 조선 후기 시집 중 가장 많은 사본(寫本)이 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이는 그만큼 사가(四家)의 이름이 유명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 명사의 시평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당대에는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본으로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목압서사에 소장된 『한객건연집』 역시 그러한 사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들 사본은 거의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시의 배열순서는 대개 창작 연대순이다.

이 책의 출판은 1917년에 『전주사가시(箋註四家詩)』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졌다. 박제영이 주석을 달고, 백두용이 교정을 하여 윤희구의 서문을 실어 한남서림에서 출간되었다. 하지만 사본과는 차이가 있다. 1917년 출판본에는 이덕무의 시 100수, 유득공의 시 100수, 박제가의 시 100수, 이서구의 시 100수가 시체(詩體)별로 수록되어 있으며, 저자들의 약력이 앞부분에 따로 모아져 있다.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隣·1878~1948) 교수가 소장하던 자료들이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있는데, 『한객건연집』 역시 그 컬렉션에도 있다. 현재 『한객건연집』은 하버드대학교 외에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학교 규장각·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영남대학교 도남문고·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일본 동양문고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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