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107) 강진 백운동 찾은 장동 김씨 김창흡 형제

부친 김수항 영암 유배돼 형제들 수발
부친 모시고 강진 등 유람, 작품 남김
김창협 6형제 모두 학문, 문학 뛰어나

조해훈 기자 승인 2023.03.20 18:05 | 최종 수정 2023.03.22 13:17 의견 0

비스듬하게 기대 누운 푸른 용의 몸이니(偃蹇蒼龍身·언건창룡신)
높은 운치 진시황의 봉함 우습도다.(高致笑秦封·고치소진봉)
도연명 거사와 해후하여서는(邂逅陶居士·해후도거사)
풍문 듣고 고요히 서로 좇았네.(聞風靜相從·문풍정상종)
영원히 무위의 계를 맺어(永托無爲契·영탁무위계)
오래 된 푸른 뫼서 소요할 것이네.(逍遙老碧峯·소요로벽봉)

 

위 시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시 「백운동 8영(白雲洞 八詠)」 중 첫 수로 그의 문집인 『삼연집(三淵集)』에 들어있다. 전남 강진군 월하면 안운마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을 방문해 그곳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읊은 작품이다. 소나무의 수령이 오래 돼 마치 용의 비늘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둘째 행의 ‘秦封’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조선 중기 때 문인 임제(1549~1587·작자가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음)가 쓴 의인체 한문소설인 『花史(화사)』가 있다. 여기에 보면 고죽군(孤竹君)인 오균(烏筠·대나무)과 대부 진봉(秦封·소나무) 등이 도나라 의 열왕인 매화(梅花)의 첫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합려성을 도읍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하여 ‘진봉’은 이 소설에 나오는 소나무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연 김창흡의 초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연 김창흡의 초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하튼 김창흡은 영의정을 지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여섯 아들 중 셋째다.

그러면 서울에 살던 김창흡이 어떻게 강진의 원림(園林)인 백운동을 찾았던 것일까? 이곳 별서정원은 이담로(李聃老·1627~?)가 중년에 들어와 조성하여 지금까지 그 후손이 이어지고 있는 공간이다.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 별서정원을 찾아 10경의 연작시를 지었다. 당시 이곳의 8대(代) 주인인 이덕휘(李德輝·1759~1828)는 자신의 아들 이시헌(李時憲·1803~1860)을 다산의 제자로 부탁했다.

이번 호에서는 김창흡의 시를 소개하면서, 그의 가족 및 백운동 별서정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먼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잠시 언급해 보겠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버렸다. 그러자 인선왕후의 시어머니 자의대비(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일어났다. 갑인년에 일어난 예송(禮訟)이라 해 ‘갑인예송’ 또는 ‘제2차 예송’으로 불리고 있다.

김창흡의 문집인 '삼연집' 내지 목차 부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창흡의 문집인 '삼연집' 내지 목차 부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년 전인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버리자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인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극심했다. 기해년에 일어났다고 해 ‘기해예송’ 또는 ‘제1차 예송’이라고 한다.

갑인예송은 기해년에 있었던 예송문제와 연결되어 남인과 서인이 다시 한 번 정치생명을 걸고 맞부딪쳤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입장에서는 인선왕후는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기 때문에 당시 예법으로는 대공복(大功服·9개월 동안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봤다. 즉 장자와 차자의 종법을 중시한 것으로 효종을 둘째 아들로 여겼다.

그러나 남인들은 왕위를 계승한 효종은 이런 종법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자의대비는 기년복(朞年服·1년 동안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 사진=조해훈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 사진=조해훈

기해예송에서는 효종을 차자로 여겨 자의대비는 3년 복이 아니라 기년복을 입었다. 즉위 15년에 이른 현종은 기해년의 복제와 함께 갑인년의 복제를 문제 삼았고, 아버지 효종을 차자로 인정한 서인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종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남인의 주장대로 기년복으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김창흡의 중부(仲父)로 서인인 영의정 김수흥(金壽興·1626~1690)을 귀양 보내고, 남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갑인예송으로 송시열·송준길 등의 서인은 정치적 위기에 몰렸고, 허적·윤휴 등 남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현종이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 때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인을 처벌했는데, 김창흡의 부친인 김수항도 이때 벼슬에서 쫓겨났다. 김수항은 이듬해인 1675년 강원도 원주에 유배됐다가 그해 가을 전라도 영암의 구림(鳩林)으로 이배됐다.

김창흡의 큰 아버지인 김수증(金壽增·1624~1701)은 1675년(숙종 1)에 성천 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있는 농수정사(籠水精舍)로 들어갔다. 다시 기용돼 벼슬을 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둔하였다.
김창흡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적소인 영암과 서울을 오가며 수발을 들었다. 그러면서 형제들이 부친을 모시고 해남과 강진의 여러 곳을 유람하였다. 김창흡이 위 시를 그 무렵 지었던 것이다.

김창흡은 24세인 1673년(현종 14) 진사가 되었으나, 부친이 갑인예송으로 유배되자 대과를 포기하였다. 물론 1684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김창흡의 부친인 김수항이 갑인예송으로 유배됐던 전남 영암 구암. 사진= 조해훈
김창흡의 부친인 김수항이 갑인예송으로 유배됐던 전남 영암 구암. 사진= 조해훈

유배에서 풀려난 김수항은 1680년 영의정이 됐다. 하지만 김수항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전라도 진도로 유배 가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이에 김창흡의 맏형 김창집과 둘째 형 김창협과 함께 경기도 포천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당시 청풍부사로 재직하던 김창협은 아버지가 사사되자, 사직하고 형제들과 영평에 은거하였던 것이다. 큰 아버지 김수흥 역시 기사환국으로 경상도 포항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 해 배소에서 사망했다.

1721~1722년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인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영의정을 지낸 김창흡의 큰형인 김창집이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경북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김창흡은 큰 형이 죽은 해에 지병이 악화되어, 그도 형과 같은 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강진의 이 백운동 별서정원에서 김창흡의 큰 형인 김창집도 시를 지었으며, 6형제 중 다섯째인 김창즙(金昌緝·1662~1713)도 ‘백운동 8영’을 지었다. 김창흡은 그의 연작시 ‘예원십취(藝園十趣)’가 널리 알려져 있다.

김창흡은 금강산을 여섯 차례나 유람하였다. 겸재 정선과도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정선의 「금강내산도」(고려대 박물관 소장)에 화제(畫題)를 써 주는 등 그를 후원하였다.

김창흡의 형제 6명은 모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육창(六昌)’이라 불릴 정도로 세간의 칭송과 주목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맞서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다. 김상헌은 좌의정을 지냈다.

안동 장씨인 김창흡의 가문은 한양 장동에 살아 ‘장동 김문(壯洞 金門)’으로도 불렸다. 김상용·김상헌·김수증·김수흥·김수항·김창집·김창협·김창흡·김창업·김창즙·김창립 등으로 대표되는 장동 김문은 15세기에 서울에 정착해, 19세기까지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가문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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